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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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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주 1980년 광주 그리고…

(21) 퐁니·퐁넛촌에 재현된 4·3과 5·18… 성폭행당한 응웬티탄은
가슴·팔 잘리고 세상 떴지만 그의 죽음은 2000년에야 알려져
등록 2014-07-18 15:43 수정 2020-05-03 04:27

“토벌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 수룡국민학교 마당에 집결시켰어. 그때 학교 교실을 모두 짓기 이전이어서 마당에는 장작들이 많았지.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한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속옷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토벌대는 그 일에도 싫증이 났던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목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하도록 강요했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가자 주민 4명을 끌고 가다가 총을 쏘아버렸지.”(1948년 5월30일, 제주시 한림면 청수2구 좌봉할아버지의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전예원, 1995)
“여기저기 피를 보고 쓰러지고 보다 못해 말리는 노파를 단검으로 찔러 쓰러지게 하고 반알몸이 된 여학생들은 유방까지도 칼로 찔리고 네 살 먹은 어린이까지 그네들이 구둣발에 채여 죽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진 사람, 반죽음이 된 시민과 학생은 그 무서운 얼룩무늬 트럭에 어디론가 실려 가버리고 온통 거리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된 것입니다.”(1980년 5월26일 광주시민 일동, 5·18 광주민주항쟁 자료집, 도서출판 광주, 1988)

f·g, 가슴 도려진 채 살아 있던 여자

“(1980년 5월19일) 광주역 앞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놓고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는 소문에 시민들이 더욱 흥분(후에 계엄분소 부사령관도 그런 시체가 있다고 시인했지만, 대검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이며 불순분자의 면도칼에 의한 소행이라고 잡아뗌)”(광주항쟁 일지, 5·18 광주민주항쟁 자료집, 도서출판 광주, 1988)

미군 상병 번이 사건 현장에서 촬영한 뒤 f와 g로 명명했던 응웬티탄의 사진 두 장과 생전 모습. 미군은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는 설명을 달았다. 응웬티탄은 생전에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일했다.

미군 상병 번이 사건 현장에서 촬영한 뒤 f와 g로 명명했던 응웬티탄의 사진 두 장과 생전 모습. 미군은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는 설명을 달았다. 응웬티탄은 생전에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일했다.

“공수부대와 시민 간에 접전이 치열했던 19일부터 22일까지는 병원 응급실은 물론 1층 환자 대기실 수납창구와 복도까지 매트리스나 보조침대를 깐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수부대가 처녀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소문과 관련, 대검으로 가슴을 찔린 여자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가슴 부위와 등을 대검에 찔린 최미자(당시 19세)양이 실려온 것은 19일 오후라고 생각된다. 최양이 찔린 정확한 부위는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로 계엄군이 젖가슴을 목적으로 찔렀는지는 이상 부위만 갖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전남대 흉부외과 의사 오봉석의 증언, 1989년 1월14일치 인용)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부터 20년이 흐른 뒤였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12년 남겨둔 때였다. 1968년 2월12일의 베트남은 제주와 광주의 중간에 놓였다. 그날 오후 2시께,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에서는 제주 4·3의 시간이 재현되었다. 5월 광주의 시간이 흘렀다. 열아홉 살 처녀 응웬티탄은 옷이 벗겨진 채 논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두 가슴은 난도질당해 피가 흘렀다. 왼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20년 전 제주에 들어온 토벌대원들처럼, 12년 뒤 광주에 투입될 공수부대원들처럼, 마을에 들어온 해병대원들은 포악했다. 과거의 토벌대원들과, 미래의 공수부대원들과, 오늘의 해병대원들은 생김새가 닮았고 같은 언어를 썼다. 1948년, 1968년, 1980년. 공격을 당한 마을과 도시엔 공포가 지배했다. 그들은 총을 쏘았고, 칼을 휘둘렀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고 성폭력. 응웬티탄은 1968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의 성폭력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2001년 4월, 한국 기자가 사진을 들고 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기까지는) 그저 f와 g라는 알파벳 기호로 명명되었을 뿐이다. f와 g 두 장의 사진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돼 있었다.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여자.” 설명을 적은 이는 미군 상병 번이었다. 그는 그날 키엠루 초소에서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다 한국군이 떠난 뒤 미군 소대원, 남베트남 민병대원들과 함께 그곳에 진입했다. 미리 준비한 카메라로 마을 입구에서부터 참혹한 정경을 담다가 논바닥에 쓰러진 그녀와 만났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윗옷이 찢겨져 있었고, 두 가슴과 팔에서 피가 흘렀다. 예리한 대검에 의한 것임을 알았다. 숨은 붙어 있었다. 그는 논에 들어가 셔터를 눌렀다. 오른쪽 측면에서 한 번, 앞에서 한 번. 그러곤 소리를 질러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을 불렀다. “여기 사람이 있다. 빨리 병원에 보내야 한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

응웬티탄은 다낭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날 그녀의 아버지 응웬전(41)은 다낭에서 비보를 들었다. 큰딸 응웬티탄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만이 아니었다. 부인 팜티깜(40)과 넷째딸 응웬티흐엉(11)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생후 5개월 된 젖먹이 막내아들 응웬디엔칸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모두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간 식구들이었다. 그는 응웬티탄과 응웬디엔칸이 함께 입원한 다낭병원으로 먼저 향했다. 응웬티탄의 상태가 더 위중했다. 두 가슴과 왼쪽 팔에 출혈이 컸다. 다낭병원 의료진은 수술을 통해 왼쪽 팔을 잘라냈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응웬전은 창문 밖에서 응웬티탄의 얼굴을 보았다. 얇은 이불을 덮고 있던 딸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응웬티탄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예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 응웬티탄은 숨을 거뒀다. 가족 네 명 중 세 명이 죽고, 젖먹이 응웬디엔칸만 살아남았다. 응웬디엔칸은 엉덩이가 날아갔다(응웬디엔칸은 불구로 생활하다 열 살이 못 되어 숨을 거뒀다).

2월12일은 음력으로 1월14일이었다. 하루 뒤면 정월 대보름. 부인 팜티깜이 세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이자 시댁이기도 한 퐁넛촌에 내려간 것은 설을 이틀 앞둔 1월28일이었다. 응웬전 가족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 퐁넛촌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일찌감치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이끌고 다낭에 올라와 세를 얻어 살았다. 응웬전은 남베트남 정부와 베트콩 중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였다. 총알이 튀고 폭탄이 터지면 민간인만 몹쓸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도시로 옮겨온 것이었다. 퐁넛 집은 응웬전의 아버지 응웬주 부부만이 지켰다. 팜티깜은 본래 설 제사만 지내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설에 휴전을 하기로 했던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을 향해 일제 공격을 감행했다. 이른바 구정대공세. 꽝남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트콩 1개 연대 규모가 호이안을 점령하고 외곽지역을 공격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팜티깜은 돌아가려 해도 교통편이 없었다. 결국 정월 대보름 하루 전까지 계속 퐁넛에 눌러 있다가 화를 당한 셈이었다.

응웬전은 본래 설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말자고 주장한 터였다. 목수 일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 다행히도 일감은 밀렸다. 혼자는 감당할 수 없어, 둘째아들 응웬디엔록(15)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함께 일했다. 설에 내려가 제사를 지내고 집 청소도 해야 한다는 부인 팜티깜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은 평생의 한이 됐다. 청소 일을 돕기 위해 응웬티탄이 따라나섰고, 젖먹이 응웬디엔칸을 돌봐주기 위해 응웬티흐엉도 함께 나서지 않았는가. 두 자매는 엄마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나머지 다섯 명의 남매가 모두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불행 중 천행이었다.

스트레스 표출? 고도의 전술?

응웬티바(17)는 다낭에 남아 무사한 남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남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 응웬전과 함께 다낭병원을 찾아 언니 응웬티탄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응웬티탄과는 두 살 터울로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둘 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다낭으로 올라가 돈을 벌었다. 응웬티바는 건설현장에서 시멘트를 섞는 잡부로 일했다. 응웬티탄은 옷 만드는 일을 했다. 언니 응웬티탄은 통통한 몸매에 성격이 유순했다. 병으로 일찍 죽은 오빠 응웬디엔자이를 대신해 집에서 맏이 역할을 했다. 옷 만드는 기술을 지닌 터라 설 때마다 동생들 옷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1968년 설에도 응웬티탄은 응웬티바에게 설빔을 손수 만들어주었다. 하늘색깔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생활복이었다.

응웬티호아(13)는 아버지 응웬전과 언니 응웬티바를 따라 병원에 가보지 못했다. 줄곧 다낭의 집만 지켰다. 어리다는 이유로 평소에도 집안일만 했다. 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와 동생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듣기만 했다. 언니 응웬티탄의 죽음이 가장 끔찍했다. 대부분 총을 맞았는데, 응웬티탄만 몸에 총상 대신 자상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응웬티호아는 한국 군인이 언니를 칼로 공격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퐁넛촌의 사건 현장에서 응웬티탄은 무슨 일을 겪었을까. 한국군의 총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쩐티투언(9)은 유일한 목격자였다. 쩐티투언은 총을 맞아 쓰러진 무리들 맨 밑에 깔렸다. 살았다. 정신을 차리고 기어나왔을 때 응웬티탄이 한국군들에게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쩐티투언은 “한국군이 응웬티탄 언니를 성폭행한다”고 생각했다. 응웬티탄의 윗옷은 찢겨져 있었다. 군인들이 손에 쥔 대검도 보았다. 응웬티탄의 집 바로 옆에서였다. 퐁니촌이 끝나고 퐁넛촌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주검이 무더기로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이었다(쩐티투언은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퐁니·퐁넛촌에 진입했던 한국군 해병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은 왜 그랬을까. 구정대공세 이후 계속된 정글 작전이 가져다준 누적된 피로감과 스트레스의 과잉 표출이었나. 전시에 처절하게 억눌려 있던 병사들의 욕망이 젊은 여성의 육체를 만나 선을 넘어버렸나. 성적 희롱을 넘어 대검으로 여성의 젖가슴을 엽기적으로 난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몸을 유린해 그녀를 구하지 못한 마을의 남성들에게 극도의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기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나. 한국군에 대한 공포를 최고치로 끌어올려 베트콩의 사기를 꺾으려는 속셈이었나. 제주 4·3 항쟁 진압 과정에서 토벌대인 서북청년단원과 군경이 그랬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 난징의 일본군과 폴란드의 독일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또는 준전쟁 상황에서 성폭력은 의례적인 일이었을까.

그리고 광주. 1980년 5월18일. 그날 0시를 기해 대한민국에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광주시 북구 용봉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구타와 살상이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18일, 19일 미친 듯 광주 거리의 시민들을 향해 곤봉을 내리치고 대검을 찍었다. 특히 19일 광주역 앞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에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훗날 라는 노래 가사에도 담겼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은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그 공수부대의 상당수 장교와 부사관들은 베트남 파병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사실로 드러난 흉흉한 소문

그보다 12년 전, 1968년 1월31일. 그날 0시를 기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에선 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됐다. 구정대공세를 벌인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대한 한·미·남베트남 연합군의 사상 최대 반격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수도 사이공엔 24시간 통행금지령까지 떨어졌다. 한국군이 주둔한 호이안 인근 꽝남성에서도 ‘괴룡작전’이라는 이름의 구정대공세 반격작전이 진행됐다. 한국군 해병제2여단 3대대는 베트콩에 점령당한 호이안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대대는 외곽지역을 차단했다. 그리고 한 달 넘게 이 일대에서 무자비한 수색·소탕 작전을 벌였다. 특히 2월12일 퐁넛촌에선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젊은 여성을 발가벗겨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미군 정보기관은 한국군 해병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언론의 접근은 차단됐다. 응웬티탄의 죽음이 한국인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광주항쟁까지 12년이 지나고도 20년이 더 흐른, 32년 뒤인 2000년이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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