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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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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사건…최종조처를 통지해주시오

⑲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이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
채 장군은 동봉한 잔혹 행위 조사보고서가 허점투성이라 판단하고…
등록 2014-06-20 13:20 수정 2020-05-03 04:27

“친애하는 채명신 장군.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전쟁범죄에 관한 주장이나 불만이 제기되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모든 미군에 대해 지시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는 제네바협약의 서명국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지시에 따라 미 해병제3상륙전사령부 소속 군인들은 제네바협약에 대한 위반 의혹이 제기된 사건, 즉 1968년 2월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촌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제한된 조사의 결과 이 사건은 역시 제네바 협약의 서명국인 귀국이 응당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임이 인정됐으며, 우리의 조사는 종료되었습니다.
동봉한 증언, 사진자료, 그리고 다른 문서들은 해병제3상륙전사령부의 기초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것입니다. 우리의 조사가 완전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나는 디엔반현 현장이 이 사건을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여단장과 논의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아마 장군께서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갖는 심각한 성격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최종 조처를 내게 통지해주길 고대합니다.
1968년 4월29일
주월미군사령관
W. C. 웨스트몰랜드”


<font color="#006699"><font size="3">어렵게 얻어낸 독자 지휘권</font></font>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42) 중장은 사이공(현 호찌민)의 사령관 공관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54) 대장이 보내온 편지 끝머리엔 친필 사인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짤막했고, 문체는 건조했다. 미군이 조사한 한국군 해병제2여단의 잔혹행위 의혹 사건에 관해 한국군 사령부 쪽이 어떻게 조치할지 묻는 내용이었다.

1967년 7월22일 베트남 중부 냐짱 근처 닌호아의 백마사단에서 열린 사단장 이·취임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그는 자신이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슬로건을 개발했다고 늘 자랑 삼아 말했지만, 실제 슬로건대로 실천됐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1967년 7월22일 베트남 중부 냐짱 근처 닌호아의 백마사단에서 열린 사단장 이·취임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그는 자신이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슬로건을 개발했다고 늘 자랑 삼아 말했지만, 실제 슬로건대로 실천됐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웨스트몰랜드 대장은 자신보다 12살 위인데다 별 하나가 많았지만, 나이와 계급 따위에 꿀리지는 않았다.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국과 한국 군대를 각각 대표하는 사령관으로서 둘의 위치는 대등했다. 3년 전인 1965년 10월20일, 사이공에 도착하자마자 한국군의 미군사령부 휘하 배속을 당연히 여기는 미군 수뇌부에 맞서 독자적 작전지휘권 행사를 강력히 주장해 관철한 채명신 사령관이었다. 작전지휘권 문제는 일국의 사령관으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중대한 원칙이었다.

그가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고집하자 미군 장성들은 “한국군을 지금까지 키워주고 가르쳐주고 돈과 물자도 다 주었는데 이제 미군을 깔보고 말도 듣지 않는다”며 비아냥거렸다. 미군이 베트남의 한국군 쪽에 모든 군수 지원은 물론 장교와 사병들의 수당까지 지급해주는 마당에 온전히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채명신 사령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 보장이 한국 국민과 한국군의 명예,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이 참석한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자신의 파란만장한 한국전쟁 전투 경험까지 곁들여가며 미군 장군들을 직접 설득했다.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 지휘권만이 청부전쟁·용병 운운하는 공산세력의 모략선전을 봉쇄할 수 있고, 이는 결국 한·미 양국에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는 힘있는 연설에 일부 미군 장군은 감동한 표정까지 지었다. 연설이 끝나자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권투 심판이 판정하듯 채 사령관의 오른팔을 덥석 잡아 추켜올려주었다. 베트남에 오기 전 만난 박정희 대통령마저 넘어서기 난감해하던 벽을 야전사령관의 힘으로 허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무어란 말인가. 사령관이 지켜왔다고 생각했던 한국군의 존엄과 명예에 생채기를 낼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편지는 한 장에 불과했지만 편지봉투는 두툼했다. 1968년 2월12일 해병제2여단 작전지역인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미군 쪽의 조사보고서와 사진 사본이 동봉됐다. 조사보고서엔 사건 현장을 목격한 미군들과 남베트남군 민병대, 베트남 민간인들의 진술이 담겼다. 사진은 한국군이 다녀간 뒤 발견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를 미군 병사가 찍은 것이었다. 채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헐적으로 한국군 병사들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쪽의 조사 요청은 있었다. 채 사령관이 관할관으로서 민간인 사살 사건과 연루된 장교·사병의 구속과 선고 형량에 최종 동의를 해준 적도 있다. 이번에도 순리대로 하면 된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빨치산 토벌작전에 영감 준 마오쩌둥</font></font>

채명신 사령관은 냉철한 군인이었다. 반공주의자로서 한국전쟁 때 30만여 명의 지상군과 해·공군 병력을 파병해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수렁에서 건져준’ 미국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지만,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의 전략에 경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실행하던 ‘수색과 섬멸’(Search & Destroy) 작전에 근본적으로 냉소적이었다. ‘수색과 섬멸’이라는 작전 방식은 당치도 않았다. 그것은 정규전에서나 써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희생자만 낼 뿐이고, 베트콩은 다시 나타날 게 뻔했다. 정글에서 수행하는 베트남전은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기 힘든 게릴라전이므로 여기에 대응할 만한 방책을 고민해야 했다.

채명신 사령관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한국군만의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전의 군사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에 주목한 아이디어였다. 이는 중국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오쩌둥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이던 1949년 10월 25연대 1대대2중대장으로 경북 영덕·청송·봉화 지역에서 태백산 공비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시절, 게릴라를 잡으려면 그들의 행태를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오쩌둥의 유격전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장제스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본토에 공산국가를 세운 적성국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충분히 존경할 만한 지략가였다. 그 책들은 태백산 인근의 빨치산 소탕작전을 지휘하는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먼저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위해 창설한 홍군의 ‘3대규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注意)를 작전을 위해 거쳐가는 농촌 부락에서 실천했다. 3대규율 8항주의는 이런 내용이었다. “첫째, 명령에 신속하게 복종하라. 둘째, 민중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라도 받지 않는다. 셋째, 일체의 노획품은 공공의 것으로 한다.(3대규율) 언행은 정중히 하며 매물(買物)을 공정히 하라. 빌린 건 꼭 반환하고 민간인의 물건을 파손했다면 반드시 변상하라. 농작물을 짓밟지 말 것이며 구타나 욕설은 안 된다. 부인들에게 추잡한 행동은 금물이며 포로를 학대하지 말라.(8항주의)

마오쩌둥은 “게릴라가 고기라면 인민은 물”이라고 했다. 채명신 사령관이 보기에도 그것은 명언이었다. 베트남에서 물과 고기, 즉 민간인과 베트콩을 분리해야 했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말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는 민간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심리전의 방편이기도 했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베트콩은 민간인들 속에 뿌리내릴 수 없고,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다. 채 사령관은 틈만 나면 한국군 병사들에게 민간인 보호와 대민봉사를 강조했다. 그 결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수는 남베트남군이나 미군에 비해 훨씬 적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령관의 명예를 걸고 언제 어디서건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한 명 베트콩 잡으려 백명 양민을 죽인 꼴 </font></font>

“연합전투소대의 민병대원이자 남베트남 국민인 응웬사의 진술: 2월12일 약 10시께 우리 6명은 CAP D-2에 있는 벙커 위에 앉아서 한국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퐁니마을에 공격이 시작됐을 때 우리가 있던 곳은 1번 도로와 아주 가까운 지점이었기 때문에 쌍안경 없이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실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쌍안경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로 진입해 주민들을 그룹별로 잇따라 죽였다. 우리는 3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소에서는 한번에 17명이 사살됐고, 두 번째 장소에서는 14명이,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는 6명, 3명이 사살됐다. 이날 오후 우리가 그 마을을 수색했을 때 나는 내 친척 10명이 사살됐다는 사실과 2명이 부상당했음을 확인했다.”(2014년 5월26일치 제1012호 참조)

채명신 사령관은 얼굴을 찡그렸다.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이 보낸 편지에 동봉된 미군 조사보고서의 한 대목을 읽는 중이었다. 미군 장교들이 진술한 내용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조사보고서가 사실이라면 한국군은 사령관이 내세운 슬로건과는 정반대로, 한 명의 베트콩을 잡는다는 구실로 백 명의 양민을 죽인 꼴이었다. 물과 고기를 분리하기는커녕, 고기들이 활개치도록 물을 갈아준 셈이었다. 병사들이 실수했을 수도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인 동물이다. 전우들의 죽음 앞에서 이성을 잃은 채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향해 발포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고 나서 상부엔 허위 보고를 했을 수도 있다.‘아니다, 모략일지도 모른다.’ 채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조사보고서는 한국군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한 것처럼 적고 있었다. 채 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 뒤 마을에서 발견됐다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주검 사진을 살펴보았다. 사진만으로는 한국군이 관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나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다. 한국군을 궁지로 몰기 위한 베트콩의 음모는 아닐까.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이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 1968년 4월29일 발신된 이 편지에서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퐁니·퐁넛 사건에 관한 미군 조사 내용을 토대로 한국군이 어떻게 조처할 것인지 물었다.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이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 1968년 4월29일 발신된 이 편지에서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퐁니·퐁넛 사건에 관한 미군 조사 내용을 토대로 한국군이 어떻게 조처할 것인지 물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이 서명한 이 편지와 조사보고서는 권위와 무게감이 좀 떨어졌다. 웨스트몰랜드는 발톱 빠진 호랑이였다. 그는 이미 한 달 전인 3월22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 의해 주월미군사령관직 해임이 결정돼, 이임을 두 달 앞둔 상태였다. 1968년 2월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이후 국내외의 반전 여론에 밀리던 존슨 대통령은 갑자기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했다(주월미군사령관 후임은 부사령관이던 크레이턴 W. 에이브럼스 대장). 형식은 더 높은 지위로의 영전이었지만,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문책성 인사’라고 썼다.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북폭 제한 철폐와 라오스·캄보디아로의 전선 확대, 전투부대 증파 등을 미국 의회에까지 나와 역설한 베트남전 주전파의 상징이었다. 평가는 야박했다. 채명신 사령관의 판단처럼, 수색과 섬멸 작전은 아무런 효과를 못 낸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구정 대공세 때도 전황을 너무 낙관했다가 미군 피해를 키웠다는 비난을 샀다.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이 잠깐 베트콩에 점령된 일도 치욕이었다. 웨스트몰랜드를 해임한 존슨 대통령은 일주일 뒤인 3월31일 전격적으로 민주당 후보로의 대통령 출마 포기와 함께 북폭 중지라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하노이 쪽에 평화협상의 손짓을 보냈다. 평화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의 해임은 그 사전 작업인 셈이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무능한 확전주의자의 발버둥?</font></font>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1952년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인물이었다. 187 전투연대사령관으로 휴전 직전 공수작전에 직접 참여한 일을 늘 자랑거리로 삼았다. 191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방직공장 지배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포병대대 사령관으로 파병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56년 미 육군 사상 가장 젊은 나이인 42살에 육군소장에 임명된 초엘리트 군인이었다. 1960년부터 미 육사교장으로 근무하다, 1964년 당시 폴 하킨스 주월미군사령관 아래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같은 해에 사령관직을 승계했다. 그렇게 베트남에서 미군들의 총대장으로 보낸 세월이 4년. 무능한 확전주의자라는 손가락질 속에 베트남을 떠나면서 한국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해명하고 조처하라는 편지를 보낸 상황은 기묘한 코미디 같았다. 채 사령관은 마음을 가볍게 다잡았다. ‘조사보고서는 허점투성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어.’ 채 사령관은 답신을 준비했다. 임기가 엄연히 남은 동맹군 최고사령관이 보내온 문서이니만큼 공식 해명서를 내야 했다. 그는 즉시 호이안에 주둔 중인 해병제2여단 본부에 사건 관련자 조사를 지시했다. (다음회에 계속)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 참고한 책
, 매일경제신문사, 1994
, 팔복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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