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남 얘기만 해오던 <한겨레21> 기자들이 한 해를 보내며 ‘개인적인’ 올해의 ○○을 꼽아보았습니다. 테니스를 배우다 많은 공을 잃어버리며 “성장했다”고 우기는 서혜미 기자, 동화책 한 권에 울컥했다 설렜다 한 ‘언제나 초심 엄마' 손고운 기자, 잦은 출장에 밑창이 벌어진 등산화를 공개하며 편집장을 은근하게 규탄한 류석우 기자까지. 기자들의 ‘민낯'을 대방출합니다.―편집자 주
아홉 살 동동이는 공터에서 혼자 구슬치기를 하며 논다. 동동이 곁에는 늙은 개 구슬이뿐, 엄마와 친구는 보이지 않고 사랑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신 것 같다. 아빠의 잔소리는 끝이 없다. 숙제했냐 안 했냐, 손은 닦았냐, 꼭꼭 씹어라, 알림장은 제대로 적어왔냐. 그러던 어느 날 동동이는 문방구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요술 알사탕을 사는데….동동이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2020년 ‘아동문학계 노벨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백희나 작가의 작품 <알사탕>이다. 여섯 살, 세 살 난 두 딸 덕분에 똑같은 그림책을 수십 번이고 읽어야 하는 ‘시시포스의 바위’ 같은 고난에 처한 내게, 그의 작품들은 빛 같은 존재였다. 몇 번을 읽어도 그때마다 울컥해지는 것을 꾹 참았고, 아이가 그의 책을 뽑아오면 안도와 동시에 설레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왜 이렇게까지?’는 그래서 한 생각이었다. 백희나 작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실제 그가 제작한 인형인데, 인물뿐 아니라 배경 세트도 지나치게 정교했다.(가령 <달 샤베트> 속 아파트는 집마다 실제 조명을 켜고 끌 수 있다.) ‘인공지능(AI)으로 뚝딱 그림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이렇게 느린 작품이라니. 이 방식이 아니면 더 많은 그림책을 낼 수 있지 않나?’ 존경심과 더불어 이런 생각을 슬쩍 했더랬다.
생각이 변한 건 2023년 10월이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백희나 작가의 첫 개인전. 20여 년 동안 그가 한 겹씩 쌓아올린 작품들이 모였다. 그곳엔 작지만 사랑스러운 동동이 집도 있었다. 아빠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동동이는 알사탕 하나를 꺼내 먹는데, 들려온 소리는 다름 아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몸을 숙여 동동이 집 창문 안을 들여다봤다. 아빠를 껴안은 동동이의 표정, 부엌에 어정쩡하게 선 아빠의 얼굴. ‘아, 이래서였구나.’
아이들은 실제 세계와 백희나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를 혼동했다. 목욕탕에 거의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이 <장수탕 선녀님>을 보고선 일요일 아침엔 목욕을 가야 한다고 조른다. <이상한 엄마> 속 구름과 안개를 본 아이들은, 먹지도 않을 계란국을 끓여달라고 한다. 이야기를 쓰는 일은 종종 건축에 비유된다. 세계를 만드는 설계도에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기록이 필요하다고 한다. 백희나 작가의 전시를 보고 생각했다. 아, 그는 비유적 의미의 건축을 해온 것이 아니라 진짜 건축을 해왔구나. 전시를 보고 돌아온 날, 컴퓨터 배경화면을 그의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 속 꽃이 핀 낙원으로 바꿨다. 부디 앞으로도 그가 만든 세계를 자주 볼 수 있길. 작가님 꼭 또 전시해주세요.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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