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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도파민 터지는 ‘매운맛 명언’에 빠지다

75만부 팔린 ‘세이노의 가르침’ 등 올해의 출판 경향과 성과
등록 2023-12-15 19:18 수정 2023-12-19 15:45
한겨레21 2023년 올해의 책

한겨레21 2023년 올해의 책

202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약 75만 부가 팔려나간 <세이노의 가르침>(데이원 펴냄)이다. ‘세이노’(SayNo)라는 필명을 가진 저자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수성가한 1955년생 남성으로 알려졌다. 20여 년 전부터 일간지 연재 칼럼을 통해 남다른 인내, 노력, 절약으로 부를 쟁취하라고 강조해온 세이노는 ‘매운맛 인생 명언’을 날리며 자기계발계의 독보적인 스승으로 떠올랐고 커다란 팬덤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 반영한 자기계발서

장장 736쪽에 이르는 이 책은 그러나 ‘가르침’이 너무 옛날 스타일이고 책 만듦새가 엉성하다는 혹평도 함께 받았다. 전자책용 피디에프(PDF) 파일은 무료, 종이책값은 7200원으로 다른 책보다 훨씬 싼 가격도 판매에 날개를 달았다. 저자는 가르침으로 돈을 벌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인세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세이노의 가르침> 외에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00위권 안에는 자기계발 분야가 15종이나 포함됐고 다수가 상위권에 포진했다.

<세이노의 가르침>이 위압적인 태도로 자기계발을 채찍질했다면, 한국형 힐링 소설은 잔잔하게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집중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윤정은 지음, 북로망스 펴냄)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지음, 클레이하우스 펴냄) 등 ‘장소 힐링 소설’이 2022년에 이어 여전한 인기를 끌었다. 사회안전망이 허술하고 실패와 성공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 속 자기계발서와 힐링 소설의 대중화는 이제 21세기 한국 출판계의 가장 뚜렷한 현상이 됐다.

집중력과 성격심리학 다룬 번역서

2023년 한 해 젊은이들은 ‘도파민’과 ‘엠비티아이’(MBTI)에 몰두했다. 인문 번역서 중에서는 <도둑맞은 집중력>(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펴냄)이 독자의 사랑을 받아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에서 모두 올해의 베스트셀러로 꼽혔다. 이 책은 속도와 멀티태스킹에 시달리고 수면의 질이 나빠지면서 인류가 산만해지는 동시에 긴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집단적 집중력 붕괴가 이뤄졌다고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도파민 중독이나 집중력 하락을 구조적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빼앗긴 시간을 되찾고 충분하게 휴식하기 위해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집중력은 ‘잃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공격받고 도난당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근대 영혼 구원하기>(박형신·정수남 옮김, 한울 펴냄)는 세속적인 프로이트주의와 자유주의 페미니즘 등이 결합한 치료요법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쓴 도우리 작가는 “자아와 사회, 경제, 정치, 문화에 침투한 치료요법 문화를 검토하며 MBTI 등 각종 성격심리학이 유행하는 이유도 심도 깊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인류학자들의 번역서도 인기를 끌었다. 인류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나라 안팎에서 상찬받은 <세계 끝의 버섯>(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펴냄)은 출간 전부터 화제를 낳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번역돼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전쟁 같은 맛>(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한국전쟁을 겪고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 조현병까지 얻으며 기구한 삶을 살았던 엄마 ‘군자’의 치열한 생존기이자 인류학자인 딸 그레이스 조가 쓴 애도의 회고록이다. 한국전쟁, 식민주의, 젠더, 디아스포라, 폭력과 트라우마의 이야기 속에 자란 딸은 그 유산을 학문적 자산으로 삼았다.

애도의 문제는 여전한 화두였다. 사회학자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교육현장에서 애도를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애도를 가르치지 않는 현실을 뚫고 나온 책들이 소중한 한 해였다”며 <선생님을 위한 애도 수업>(김현수 외 지음, 창비교육 펴냄)을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여전한 양서, 과학과 페미니즘

환경·과학책 가운데 <한겨레> 기자 출신 남종영 환경논픽션 작가(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의 <동물권력>(북트리거 펴냄)이 여러 언론의 눈길을 받았다. 동물이 인간 지배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물의 삶을 지구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책이다. 남 작가는 올해의 과학책으로 <다윈의 사도들>(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과 <기후 책>(그레타 툰베리 지음, 이순희 옮김, 김영사 펴냄)을 추천했다. <다윈의 사도들>을 놓고 남 작가는 “진화론에 대한 지식의 허들을 낮춘,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중적인 저작”이라고 말했다. <기후 책>은 “툰베리의 이름값만 보지 말고, 과학과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알 만한 당대 최고의 작가들을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젠더·페미니즘 분야에서는 남녀,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 등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고 종의 경계를 허물어온 다학제적 학자 도나 해러웨이의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황희선·임옥희 옮김, 아르테 펴냄)가 사려 깊고 전문적인 번역으로 새롭게 나왔다. 도우리 작가는 “‘인생샷’이라는 문화가 여성들의 삶과 어떻게 연루됐는지, 정치적인 관점에서 촘촘하게 들여다본다”며 <인생샷 뒤의 여자들>(김지효 지음, 오월의봄 펴냄)을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수미 지음, 어떤책 펴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신성아 지음, 마티 펴냄) 등이 나와 ‘모성 인문학’의 지평을 확장한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11월 말 출간된 정희진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펴냄)은 페미니즘 백래시라는 광풍 속에서 논쟁적인 페미니즘 이슈를 분석하며 ‘젠더 갈등’ ‘피해자 중심주의’ ‘성적 자기 결정권’ ‘여성성의 자원화’ 같은 현재적 문제에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다. ‘지금 여기’를 진단하는, 한발 더 나아간 ‘페미니즘의 도전’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한겨레21이 뽑은 올해의 책
한겨레21 2023년 올해의 책

한겨레21 2023년 올해의 책

전사들의 노래
홍은전 지음, 훗한나 그림, 오월의봄 펴냄
“선을 넘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전사들은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고 한국 사회를 이동시켰다.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 6명의 ‘전사’를 만나 인터뷰했다. 책에 등장하는 장애인 활동가들은 지금도 연행되고 있다.

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
유일무이한 한국의 노동운동가이자 정치인, 노회찬의 5주기를 앞두고 나온 평전. 600쪽짜리 정본 평전인 동시에 한국 진보정치사를 망라했다. 출간과 동시에 중쇄에 들어갈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작가 이광호는 4년 동안 221명을 인터뷰하고 200자 원고지 3600장을 썼다. 노회찬이 택한 구원과 깨달음의 길을 만나자.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최진영은 “이 소설만큼 죽음이란 주제에 몰두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올 한 해 최진영 소설의 분기점으로 일컫는 장편소설.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생물, 수천 년 무성한 나무의 생 가운데 이파리 한 장만큼을 빌려 죽을 위기에 처한 단 한 명만을 구할 수 있는, 나무와 인간 사이 ‘수명 중개인’ 이야기.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펴냄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나 제국주의 식민지 체계, 전쟁, 성폭력, 이민자 차별 등을 겪다 조현병이 발병하고 2008년 숨진 어머니의 생애를 탐구했다. 저자는 “어머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고 애도하는 데 실패한 한·미 사회에 대한 정의 회복 프로젝트”라고 썼다. 그 프로젝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펴냄
인간 사회를 연구해온 인류학의 전통을 완전히 뒤흔든 역작. 송이버섯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문화인류학의 새 장을 열었다. 인간과 비인간은 얽혀들며 모자이크를 이룬다.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피하다. 서로 침범하는 오염과 불확정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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