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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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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삶으로 쓴 <슈룹>, 버려도 되는 경험은 없다

[22writers]④ <슈룹> 박바라 작가
내가 겪지 못한 시대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등록 2023-03-14 01:47 수정 2023-03-17 04:14
드라마 <슈룹>의 주인공 중전 화령(김혜수 분)의 모습.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드라마 <슈룹>의 주인공 중전 화령(김혜수 분)의 모습.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갑작스레 병으로 숨지자, 남은 왕자들 사이에 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이 벌어진다. 왕의 소생 중 단 한 사람만 차지하는 자리. 궁중의 모든 후궁이 모범답안지까지 빼돌리며 아들의 성공을 노심초사 바란다.

하지만 고귀인(우정원 분)의 아들 심소군(문성현 분)은 왕이 낸 과제를 끝내지도 못하고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해 굶주린 채 돌아온다. “이 꼴을 보일 거면 차라리 죽지 그랬느냐? 널 낳은 게 후회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모진 말을 들은 심소군은 그만 생을 놓아버리려 한다.

이튿날 아들이 응급처치를 받았단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뛰어온 고귀인에게 중전(김혜수 분)은 말한다. “난 앞으로도 고귀인이 아이가 잘못했을 때 혼을 내는 모친이었으면 좋겠네. 심소군 역시 따끔하게 혼이 나더라도 고개는 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네.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으나 가장 큰 벌을 받은 사람 또한 자네니까.”

퓨전사극 드라마 <슈룹>의 한 장면이다. <슈룹>은 자식들의 치열한 왕세자 경쟁과 부모들의 권력욕을 실감나게 그려 ‘조선판 스카이캐슬’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중전마마’가 떡 버티고서 상처받는 이들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중전 역시 아들들이 왕위를 놓칠까봐 불안해하고 아이를 호되게 가르치는 엄마지만 경쟁에서 낙오한 후궁의 자식을 내버려두진 못한다. 이런 등장인물의 매력 덕분에 <슈룹>은 신인 작가의 데뷔 작품임에도 2022년 tvN 드라마 시청률 순위 1위를 차지했다. 3월2일 서울 마포구 스튜디오드래곤에서 <슈룹>의 박바라(44) 작가를 만났다.

박바라 작가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본인 제공

박바라 작가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본인 제공

아이 키우며 든 복잡한 마음, 화령에게 스며들어

앞에 나온 장면은 박 작가가 자녀를 키우며 했던 고민을 녹여서 썼다. 심소군을 감싸는 중전의 대사도 육아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나는 내 아이 혼낼 수 있어도 남이 혼내는 건 못 참는 그런 복잡한 감정 있잖아요. 우리 아이가 누구한테 혼나더라도 얼굴은 들고 살 수 있음 했죠.”

박바라 작가는 2022년 <슈룹>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방영 당시 43살이었으니 이른 편은 아니다.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뒤 2014년까지 작가원을 다니며 극본 공모전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딸이 태어나고 외국에 거주하며 5년의 공백기도 있었다. 2019년 지인의 권유로 떠밀리듯 낸 극본이 오펜(O’PEN) 공모전(CJ ENM의 신인 창작자 발굴·지원 사업)에 당선돼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어른으로서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가 늘 육아의 고민이었어요. 화령(김혜수 분)만큼 좋은 엄마는 아니어도 그렇게 되고 싶었죠.”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중전 화령의 대사는 한줄 한줄이 ‘좋은 어른’의 표본이다. “(후궁의 아들 보검군이 세자 경합을 포기했을 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거라.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 네가 아프다는 거.” “(계성대군이 성소수자임을 알았을 때) 저 녀석의 마음을 생각해봤어. 넘어서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을 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난 외면하지 못하겠더라, 엄마니까.”

정작 박 작가 자신은 엄마로 살며 아이에게 미안할 때가 많았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아이 학교 보내고 작업실에 출근하면 거의 해가 져서야 귀가했다. “메모하는 저를 보고 딸아이가 처음엔 ‘엄마는 공부를 열심히 하네’ 했어요. 그러다 자기를 잘 안 봐준다 싶으니 ‘글 안 썼으면 좋겠어’ 하더군요. 딸아이가 조금 자란 지금은 ‘엄마가 작가’라고 친구들이 알아봐준다고 좋아해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모두 메모장에 옮기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박 작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드라마 쓰기를 꿈꿨다. “방학 때 삼촌들이랑 <천녀유혼2>(홍콩 판타지로맨스 영화) 비디오를 빌려서 봤는데요, 2화를 먼저 보니까 1화 내용이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저 혼자 어떤 내용일지 상상하고 글로 써봤죠. 그때부터 드라마에 푹 빠져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박바라 작가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던 2001년(당시 22살)에 쓴 드라마 소재 및 글감 모음 수첩. 박승화 선임기자

박바라 작가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던 2001년(당시 22살)에 쓴 드라마 소재 및 글감 모음 수첩. 박승화 선임기자

글감 얻으려 주유소·새벽시장 다니며 노동

처음엔 수첩과 교과서, 휴지 귀퉁이에 조금씩 끄적였다. 나중엔 ‘소재’와 ‘인물’, ‘자료’별로 수첩을 따로 마련했다. 눈에 띄는 신문기사가 있으면 수첩에 오려붙이기도 했다.

“처음엔 떠오르는 이미지로 그림을 먼저 그려요. 그 그림에 육하원칙으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여기에 누가 있었고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상상하는 거죠. 대충이라도 이야기를 써봐서 끝이 잘 보이지 않으면 그냥 두고요, 이야기에 살이 붙고 가지를 쳐낼 수 있으면 계속 갑니다. 그러면서 다음 장면으로 가고 다음 장면으로 가고… 끈질기게 계속 가는 거예요.”

첫 작품 <슈룹>도 그렇게 탄생했다. 처음엔 ‘궐내 상궁 스파이’가 있으면 재밌겠다는 것에 착안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작았다.” 뻗어나간 가지를 쳐내고 나니 ‘30㎝ 비녀를 꽂은 중전’이 남았다. 큰 권력을 쥔 여자는 궐 안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누구일까. 실은 자식이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니 이야기 조각이 붙었다. 왕실 교육과 속 썩이는 왕자 등을 더하니 이야기가 점점 불어났다.

그는 이야기를 직접 모으는 사람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 뒤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글 쓰는 소재를 생생한 현장에서 얻고 싶어 주유소와 간판제작업체, 동대문 새벽시장 등을 다녔다. “바닥에 떨어진 대본 한번 보려고”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도 여러 번 다녔다. “작가한텐 쓰레기가 없다고 하잖아요, 모든 경험을 언젠가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주유소 나오는 장면을 에피소드로 써야 하면 저는 자료조사 없이 바로 쓸 수 있죠.”

쌓이는 이야깃거리는 많았지만 드라마 제작으로 이어지긴 어려웠다. 2014년 한국방송(KBS)의 인턴 격인 ‘신인작가그룹’에 뽑혀 6개월간 활동했으나 실제 작품을 제작할 기회는 없었다.

“너무 하고 싶을 때는 오히려 잘 안되더라고요. 공모전도 최종심에서 자꾸 떨어지니까 ‘나는 한 방이 없는가보다’ 싶고요. 너무 많이 걸어왔으니까 돌아설 수도 없고….”

운동선수처럼 연습해야 글쓰기 능력 유지

아이를 키우는 동안 5년의 공백기도 있었다. “그땐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 같았어요. 그러다가 공모전이 열렸는데 지인이 내보라고 엄청 채근하더라고요. 예전에 쓴 작품 <너테, 얼음의 다락>을 급하게 찾아서 냈는데 당선됐죠.”

힘을 얻어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작법을 다 잊은 듯 낯설었다. 다행히 ‘오펜’에서 단막극 쓰는 단계부터 차근차근 도움을 줬다. 그는 잊었던 것을 차츰 기억해냈다. <슈룹>도 오펜에서 기획한 작품이다.

글쓰기 훈련도 다시 시작했다. 극작가 지망생인 친언니와 비공개 인터넷 공간을 열어 매일 글을 올렸다. 분량은 자유주제로 한 사람당 A4용지 2장 이상. 한 달이면 40장이 넘는다. “작가도 피겨선수처럼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기량이) 나오지 않아요. 과제를 하려고 억지로 이것저것 찾다보면 아이디어가 새로 나오기도 하죠.”

그는 요새도 드라마 소재를 찾으러 대중교통이나 찜질방 등을 자주 찾는다. “전철을 타서 칸을 옮겨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요, 찜질방 가서 삼삼오오 음료수 마시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해요. <슈룹>의 태소용(김가은 분)처럼 귀엽고 통통 튀는 인물을 만들 때는 카페에 가서 사람들 화법을 듣기도 합니다. 제 지인과 상상력은 한정돼 있으니까요.”

언제나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갈 땐 한없이 가지만, 막힐 땐 한없이 막혀요.” 그럴 땐 잠깐 다른 이야기를 손에 쥔다. 그는 평소에도 작품을 동시에 서너 편씩 굴리며 쓴다. “혹시 그중에 하나만 살아남더라도 나머지 작품에서 가져올 게 있거든요.”

<슈룹>에서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아들 계성대군(유선호 분)을 화령이 받아들이는 장면도 이렇게 탄생했다. 자신을 내칠까 두려워하는 아들에게 중전은 도리어 여성으로 분장한 아들의 초상화와 비녀를 건넨다. “언제든 네 진짜 모습이 보고 싶거든 그림을 펼쳐서 보거라. 이 비녀도 딸이 생기면 주려 했던 것인데 너에게 주마.”

tvN 제공

tvN 제공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 사전>에서 건진 ‘슈룹’

‘성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자녀’는 사극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소재다. 박 작가는 <슈룹>을 쓰며 다른 현대극도 같이 쓰고 있었는데, 그 극본에서 계성대군 일화를 가져왔다. “사극과 현대극이 언뜻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둘이 만나면 더 독특해질 수 있어요.”

박 작가는 특히 시대물에 애정이 많다.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내는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시대 얘기는 뉴스와 다큐에도 나오지만 시대물은 그 시대밖에 못 담는 얘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 상상만 해본 것을 구현해낸다는 매력이 있어요. 특히 사극은 아름다운 우리 한복과 문화재의 멋을 소개하는 재미도 있고요.”

<슈룹>이 얼개를 갖췄을 무렵부턴 동네 도서관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극에 필요한 소재와 소품 등을 건지기 위해서다. <슈룹>에는 구멍이 뚫린 술잔인 ‘계영배’(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가 나온다. 술을 7할 이상 따르면 구멍으로 술이 새어나간다. 중전 화령이 심소군을 위로하며 계영배를 건넨다. “국모인 나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한다면 꽉 채우지 않아도 썩 잘 사는 것이다.” 이런 소재는 책에서 발견했다. “주로 그림과 사진 있는 책 위주로 봐요. 글은 맥락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는데 그림은 금방 이해되니까요. 계영배도 역사책을 보다가 찾았는데 모양도 예쁘고 기능도 특이해서 적어뒀죠.”

평소 옛말을 찾아보는 취미도 도움이 됐다. 드라마 제목 ‘슈룹’은 우산이라는 순우리말이다. 그는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 사전> 등을 뒤적이며 특이하고 예쁜 말을 수집하다가 그 단어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사전조사도 실제 드라마 제작 땐 수정이 불가피하다. <슈룹>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구상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저는 신인이라 아직 무엇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감이 부족해서 대안을 다 써봅니다. <슈룹> 정식 대본에 안 들어간 대본만 2천 장이 넘어요.”

박바라 작가가 <슈룹> 제작 때 화이트보드에 적어놓은 이야기 흐름도. 박바라 제공

박바라 작가가 <슈룹> 제작 때 화이트보드에 적어놓은 이야기 흐름도. 박바라 제공

드라마는 누구나 편하게 놀 수 있는 놀이터

2년을 <슈룹>만 썼다. 다 쓴 대본을 배우들이 읽는데 1~5회와 6~10회의 대사 느낌이 서로 달랐다. 방영을 앞두고 6~10회를 새로 썼다. 주요 사건만 남기고 대사와 장면은 전부 갈아치웠다. “드라마 쪽은 원래 수정이 많아요. 괴로워할 시간에 그냥 빨리 고치는 게 낫죠.”

대사도 수시로 고쳤다. 쓸 때는 재밌던 대사가 귀로 들으니 “말맛이 없었다”. 배우의 말투를 고려해 대사를 다듬기도 했다. 배우들이 대본 읽는 소리를 듣다보면 개개인의 말버릇이나 독특한 어감이 느껴진다. 그에 맞춰 대사를 수정한다. 배우가 직접 대사를 제안하기도 한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배우들이 저보다 더 몰입해 있어서 자연스러운 대사를 많이 제안해요.”

이야기를 담는 도구는 여럿이다. 박바라 작가는 드라마를 택했다. “놀이터가 아무나 가서 놀 수 있는 매력이 있잖아요. 주변 가까이에 있고 아무 때든 가서 재밌게 놀 수 있는 게 놀이터죠. 드라마도 그런 문턱이 낮은 놀이공간처럼 느껴져서 좋아해요.”

<슈룹>은 2022년 12월 종영했다. 박 작가는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그는 사람들이 즐겁게 몰입하는 드라마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사람들이 한 번을 보더라도 볼 때 정말 재밌어서 시간이 저절로 흘러가는, 그런 드라마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고요.”

그에게 드라마는 ‘인생의 덤’이다. “제 몫의 식사를 하는데(제 인생을 사는데) 뭔가를 더 줘서 더 맛있게 먹는 느낌이죠. 아마 전 (극본) 당선이 안 됐더라도 계속 드라마를 쓰고 있었을 것 같아요.” 박 작가가 웃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t@hani.co.kr

에필로그

박바라 작가와 대화하며 눈사람 만드는 장면을 연상했다. 손안의 눈 한 줌을 꼭꼭 뭉치고 굴려서 커다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슈룹>의 16부작 이야기뿐만 아니라 평생 이야기 쓰기를 연습한 그의 삶도 그랬다. 그가 내게 참고 삼아 빌려준 ‘소재 수첩’(글감이 될 만한 소재를 적어둔 수첩)은 무려 2001년에 작성한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 <다산의 법과 정의 이야기> <조선잡사> 등 사극 대본에 참고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시청자로서 <슈룹>을 보며 ‘사극 쓰는 작가는 정말 많은 걸 찾아봐야겠구나’ 막연히 짐작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박 작가는 그 노력을 과시하지 않고 차근차근 글 쓰는 길을 안내해줬다. 드라마를 쓰고 생각할 때 가장 즐겁다는 그. 박바라 작가는 다음 작품도 흠뻑 즐기면서 쓸 것 같다.

박바라 작가 사무실에 꽂혀있는 책 목록들. 작가 제공

박바라 작가 사무실에 꽂혀있는 책 목록들. 작가 제공

작품 목록

<너테, 얼음의 다락>(오펜 당선작): 2019년 CJ ENM의 신인 창작자 발굴·지원 사업 ‘오펜’의 3기 당선작. 소년 소녀가 주고받는 수첩 필담이 사랑스럽다.

<슈룹>(tvN, 2022년): 조선시대 배경의 퓨전사극 드라마. 카리스마 있는 중전이 천방지축 왕자들을 훈육하다가 궐내 암투에 뛰어드는 이야기. 김혜수 배우와 김해숙 배우의 대결이 극에 긴장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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