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라나>의 서이레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금기는 없어, 꽂히면 쓴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46.html
하고 싶은 이야기가 비교적 명확했던 것은 2018년 연재작<라나>다. <라나>에는 특정한 운명을 부여받은 여성, ‘성모’의 몸을 숙주로 삼아 다른 행성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는 신 ‘나함’이 등장한다 . 그때 서이레 작가가 꽂혀 있던 아이템은 ‘성모마리아’ 다 . 그의 성모마리아는 어쩐지 엉뚱하고, 동시에 도발적이다. “‘메시아를 낳기 싫어 . 메시아를 낙태하고 싶은데?’ 이런 성모 캐릭터에 좀 꽂혀 있어서. 그때 아마 임신중지권 관련해 이야기가 나오던 때일 거예요. ‘성모마리아’라고 하면 멋진 성인인데, 모두가 내가 메시아를 임신했다고 했을 때 낳고 싶을까 ? 저는 아니거든요 . 나는 내가 메시아가 되고 싶은 사람이지 성모마리아가 되고 싶진 않아 .” 그때 SF, 환상문학이 가진 강점이 그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을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모순, ‘낙태하는 성모를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SF로 이끌었다.
작품 <정년이> 또한 서이레 작가가 ‘꽂힌 이야기’ 에서 출발했다 . 이번에 그가 꽂힌 아이템은 ‘여성국극’ 이었다. 1930년대부터 1950 년대까지, 주민등록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한반도가 그의 흥미를 끌었다. 성별이분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아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는 , 여러 문화가 들어와 어우러지기 시작한 ‘도가니’같은 시대다. 그러나 그즈음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시대상을 잘 표현하는 것은 그에게도 큰 어려움이었다. 대본을 제외하고는 여성국극에 대한 자료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여성국극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영상을 보지 못해서 어떻게 연출할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했던 미디어아티스트 정은영 선생님 한테 가서 자료를 좀 달라고 깡패처럼 굴었는데 , 왜 주겠어요 . 얘가 누군 줄 알고 .( 웃음 ) 정은영 선생님이 너무 자료에 기대기보다 상상으로 메우는 게 훨씬 좋을 수도 있다는 코멘트를 주셨고, 그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 여성국극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보다 현대의 우리가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 그 뒤로 그의 화두는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여성국극은 무엇일까 ’ 였다 . 그는 당시 여성국극의 특징으로 ‘ 관객들이 느낀 해방감 ’ 을 꼽았다 . 남성들이 전쟁터로 떠나고 나서 여성들은 경제력을 가지게 됐지만 , 그만한 지위나 대우를 받지 못하던 여성들이 여성국극을 보며 느낀 해방감이 있다 . 지금 우리가 보는 여성국극도 마찬가지다 . ‘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 ’ 는 성별이분법 안에서 생각하는 해방감보다는 ‘ 한 인간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 ’ 고 느끼게 하는 해방감이 그의 손에서 풀려나온 현대 여성국극의 이야기에도 녹아들어 있다 .
여성국극을 다룬 <정년이>에서 무엇보다 흥미를 끄는 것은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성’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신비롭고 묘한 조연이 있다. 바로 ‘주란’이다. 주란의 대사 중 “ 무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요 . 사람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에요 . 그래서 순간순간을 진실하게 살아야 해요 . 후회하지 않게 ” 라는 대사가 있다 . 서이레 작가는 처음 기획할 때는 주란이 옥경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 ‘ 사랑에 몸이 불타버려 완전히 산화하는 ’ 레즈비언 캐릭터였다고 말했다 . 그러나 작가는 주란을 너무 비극적인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 “ 이 이야기를 기획할 당시 20대 중후반 여성들 , 제 친구들은 미래를 상상하는 게 되게 어려웠거든요 . 10 년 정도의 계획은 상상할 수 없었고 . 그건 정말 어렵고 . 5 년 , 3 년 이런 짧은 계획도 꾸릴 수가 없었어요 .”
그의 주변 2030 여성들은 긴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 살아 있을 수 있을까 , 생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 . 그럼 한 1년 단위 나 6개월 단위의 삶만 계획하면서 산 건데 , 그러다보니 지금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건강해야 하고 , 금전적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서이레 작가를 비롯한 주변의 힘든 청년들은 그러지 못했다 . 그리고 주란은 그런 면들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됐다.
그가 만든 매력적인 인물과 독특한 시대상 , ‘ 여성국극 ’ 이라는 신선한 소재까지 여러 요인에 힘입어 < 정년이 > 는 큰 인기를 끌었다 . < 정년이 > 연재 당시 댓글창에서도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 독자들은 < 정년이 > 가 연재됐던 네이버웹툰 플랫폼의 유료 화폐 단위인 ‘ 쿠키 ’ 를 시대상에 맞춰 ‘ 강정 ’ 이라고 불렀다 . ‘ 정년이 강정길만 걸어 ’ ‘ 정년이 보려고 돈 벌어서 강정 구웠다 ’ 는 반응이 ‘ 베스트 댓글 ’ 상위권을 차지했다 .
작가는 이런 반응을 알고 있을까 . 댓글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 그는 ‘ 댓글을 잘 보지 않는다 ’ 고 답했다 . “<VOE> 로 데뷔했을 때 댓글창이 말 그대로 난리 났거든요 . 남동생이 ‘ 누나는 이런 거 보면서 연재 어떻게 해 ?’ 라고 했는데 , 저는 오히려 즐거웠어요 . 좋은 ‘ 어그로 ’( 관심 ) 를 끌고 있군 , 이런 생각이 들어서 .” 그는 댓글을 잘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 ‘ 댓글이 작품에 도움이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 ’ 한다고 답했다 . “ 내가 이 이야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는데 댓글이 더 잘 알면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느껴지거든요 .”
< 정년이 > 의 드라마화 소식은 웹툰 팬덤의 많은 기대를 모았다 . 많은 팬이 원했던 김태리 배우가 ‘ 정년 ’ 역할에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 인터뷰 전 < 정년이 > 촬영장에 다녀왔다던 그에게 드라마 진행을 묻자 , 그는 ‘ 크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 고 답했다 . 그에게는 만화와 드라마의 작법이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한 화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훅을 걸어 끊는 웹툰과 달리 한 편이 50분 단위인 드라마는 호흡이 다르다 . 드라마는 드라마의 문법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니까 < 정년이 > 의 드라마 제작 자체는 작가에게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다 . “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죠 . 작품을 많이 사랑해주시는 거니까 . 너무너무 운이 좋다고 느낍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
슬쩍 차기작의 힌트를 묻는 내게 그는 요즘은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 그의 본가는 이주노동자가 많이 살고 있는 시골이다 . 이 때문에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가깝게 여긴다 .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 있지만 없는 아이들 > 또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 미등록 이주아동이 겪는 어려움을 전혀 모르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 웹툰의 장점은 대중성이잖아요 .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어필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인데 .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도 알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저는 웹툰을 하니까 .”
웹툰을 하는 사람 . 서이레 작가는 작가로서의 자신 ,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 그는 자신에 대해 ‘ 오래 열심히 하는 사람에 가깝다 ’ 고 정의했다 . “ 저는 천재적이거나 이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 어쩌다 보니 오래 버틴 사람이죠 . 그럴 수 있어서 감사한 일이고 . 버티기가 좀 힘들잖아요 .” 버틸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묻는 내게 그는 ‘ 말이 많아서 ’ 라고 답했다 . “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 그것만큼은 자신 있는 것 같아요 . 이 말을 하고 싶다 . 이걸 안 하면 죽을 것 같아 . 말이 많고 가르치고 싶고 꼰대질하고 싶어서 .”
신채윤 <노랑클로버> 저자
올곧은 눈빛을 한 서이레 작가를 보며 문득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모두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이런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당돌하면서도 세상에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된 눈을 가진 그들의 모습이 차례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작품 < 정년이 > 속 , 정년이가 소속된 국극단의 대배우인 문옥경은 이렇게 말한다 . “ 삶은 정말 위대하지 . 목적 없이도 살 수 있다니 . 하고 싶은 일만 힘껏 하고 떠날 수 있어 .”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간구하며 살아간다 . ‘ 왜 사는 거지 ’ ‘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 ’ 라고 물으며 방황하는 이들에게 서이레 작가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
마음이 무너질 때 , 세상이 어두울 때 우리는 누군가 글로 , 그림으로 , 노래로 기록한 것에서 필요한 구원을 찾는다 . 웹툰을 보는 마음도 결국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 , 그래서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쓰는 서이레 작가에게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
<VOE> 2015년 다음웹툰 연재(현재 네이버웹툰 서비스 중). 유리천장에 부딪혀온 ‘ 설경 ’ 과 ‘ 겨운 ’ 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화장품 멀티스토어 ‘VOE’ 를 일궈나가는 이야기 .
< 소녀행 > 2017년 다음웹툰 연재(현재 네이버웹툰 서비스 중). 저주받은 소녀 ‘ 혜 ’ 가 저주를 풀고 유일한 친구 ‘ 영비 ’ 를 구하러 떠나는 여정 .
< 라나 > 2018년 네이버웹툰 연재. 사이보그와 로봇만이 존재하는 시대 , 사이보그가 된 ‘ 요한 ’ 과 마지막 남은 인간 ‘ 라나 ’ 가 세상을 지배하는 ‘ 나함교 ’ 에 맞서 그들의 세계를 지키는 이야기 .
< 정년이 > 2019∼2022년 네이버웹툰 연재. 1950 년대 , 목포 소녀 ‘ 정년이 ’ 가 뛰어난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까지 성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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