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약간 좀 뭐에 들려 있었어요. 정말 이상했어요.”
지난 몇 년, 견디기 힘든 절망의 늪 한가운데 있었지만 기회도 함께 찾아왔다. ‘루나’ 홍인혜 작가는 커다란 눈망울에 반전 매력이 있는 성실한 직장인 캐릭터 ‘루나’를 창조했다. 루나는 때로는 열혈 신입사원으로, 때로는 따라잡기 힘든 패션 스타일에 힘겨워하는 평범한 청춘으로 조금씩 성장하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부모 집에서 독립해 여성 1인가구의 짜증 나는 상황에 시달리다 운명처럼 구한 새집에서 루나는 끝내 전세 사기에 휘말린다. 고통받던 파리한 영혼의 주인공은 지옥 같은 상황을 자기 힘으로 종료하는 불굴의 투사로 변신해 갈채를 받았다. 루나는 홍인혜고, 홍인혜는 루나였다. <루나의 전세역전>은 바로 작가가 겪은 100% 실화다. 2024년 4월2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면 인터뷰, 5월10일 서면 인터뷰(조심스러운 이야기였으므로 정제된 언어로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작가나 기자나 서로 소심했던 까닭?)로 그를 만났다.
1982년생 홍 작가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2004년 메이트커뮤니케이션을 거쳐 2007년 글로벌 광고회사 티비더블유에이(TBWA)코리아에 입사했다. 작가는 ‘즐거움엔 끝이 없다’(tvN)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시디즈) ‘교촌은 이런 치킨입니다’(교촌치킨) 같은 유명 카피를 쓴 베테랑 카피라이터다. 2006년 누리집 ‘루나파크’에서 카투니스트로 데뷔한 그는 10년 가까이 일기 형식의 ‘생활툰’을 연재했다. 그 뒤 에세이와 만화 단행본을 냈고 2016년 독립생활 에세이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을 발간하자마자 전세 사기를 당했다. 사건은 2018년 종료됐다. 그해 10월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이듬해인 2019년 퇴사해 프리랜서가 됐으며 2021년 ‘루나의 전세역전’을 인터넷에 연재하고 같은 해 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을 냈다. 그다음 해인 2022년 첫 시집 <우리의 노래는 이미>를, 그다음 해 2023년 <루나의 전세역전>(이하 <역전>)을 발간했다. 30대 중후반을 지내며 ‘어른’이 되는 길은 쓰디쓰고, 쓰라렸다. 동시에 그만큼 성취도 있었다.
“무의미한 고통일까봐, 패배자의 서사로 끝날까봐 그게 제일 고통스러웠는데 그 와중에도 뭘 계속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내가 겪는 일이 창작의 재료가 된다는 게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었습니다.”
‘집순이’였지만 집은 나만의 휴식공간인 ‘케렌시아’가 아니라 안녕을 위협받는 공포스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집주인이 세금을 체납해 전세금을 날릴 뻔했던 전세 사기 사건은 스스로 해결했다.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거나 누가 돈을 대준 게 아니라 혼자 노동하고 돈을 모아 집을, 아니 자신을 구했다. 어느 날 낯선 행성에 떨어진 영웅처럼 천천히 일어서서 내가 ‘나’를 도운 거다. 작가는 기록하고, 글을 쓰고, 만화를 그렸다. 그 만화가 이제는 ‘만화가 홍인혜’의 대표작이 됐다.
창작자로서 카피라이터와 만화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유튜버, 인스타그램 팔로어 9만의 인플루언서라는 정체성까지 추가해 여러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사람이 됐다.
“얘에서 결핍을 느끼는 걸 얘로 풀고 얘에서 모자란 걸 쟤로 풀고…. 광고 일은 경제적인 수익은 되는데 클라이언트가 명확하고 ‘내 거’라는 직인이 없잖아요. 만화를 그리면 ‘내 거 찜콩’ 하면서 할 수 있는 대신에 너무 정제된 말만 자꾸 하게 되는 거예요. ‘에세이툰’의 주인공은 바로 나니까, 대중 반응이 무서우니까, 내 진짜 우울하고 슬프고 어둡고 참혹한 내면을 잘 표현 못하는구나, 싶죠. 시는 자유로움과 창작의 희열은 있지만 당연하게도 경제적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하고 너무 마이너하잖아요. 그런데 또 그 반대에 있는 게 광고. 그러니까 이제 서로 뱅글뱅글 도는 거예요.”
홍 작가는 자신이 하는 카피, 만화, 시 창작 활동을 ‘걔’ ‘쟤’라고 의인화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진심이었다. 고교 때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도 카피라이터, 만화가였다.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돌진했고, 계속했고, 꿈을 이뤘다. ‘창작관종’은 그렇게 ‘창의노동자’가 됐다.
직장생활을 뺀 일상의 대부분은 덕질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그는 프로야구 엘지(LG) 트윈스의 팬인데, 계기는 단순했다. 은행에서 이자를 조금 더 높여준다며 응원하는 프로 구단을 하나 정하라고 했고, ‘엘지가 지난해 못했으니 올해는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은행원의 권유를 들었다. 그 순수한 눈빛에 스친 찰나의 광기를 인지하지 못했던 홍 작가는 미끼를 덥석 물고 엘지를 응원하기로 했다.
광고회사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홍 작가. 예전엔 카피로만 돈을 버는 ‘덕업반일치’였다면 지금은 만화를 그려서도 경제생활을 하는 완전한 ‘덕업일치’를 이뤘다. 그런데 뜻밖의 얘기를 했다.
“옛날에 걔는 내 취미이자 자아실현이었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너는 내 끝사랑’ 막 이러면서.”(웃음)
처음 만화와 사랑에 빠진 건 어렸을 적 친척 오빠네에서 <드래곤볼>을 보면서였다. 만화가가 건설한 ‘세계관’을 만났고,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순간부터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부단한 연습, 필사의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저는 루나 얼굴을 못해도 1억 개는 그렸을 것 같은데도 아직도 사흘만 안 그리면 애가 눈이 막 삐뚤어지고 그래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스캔하는 정통 방식을 쓴다. 하지만 이제는 노동과 창작과 놀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직장인 시절에 돈은 회사에서 벌고, 순수 창작의 즐거움은 집에서 만화를 그리고 시를 쓰면서 누렸지만, 지난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달라졌다. “어느 순간 100원 한 장 떨어지지 않는 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런 자신을 발견한 순간, 조금 슬펐다고 했다.
“옛날에는 내가 막 돈을 들여서라도 하는 사랑이었는데,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로운 일을 좀 벌여봐야겠다, 돈이 안 되고 인기가 없을지라도. 그 생각을 요즘 하고 있어요. 올해 말에 다이어리랑 일력을 만들어보려 하고 있어요.”
사실, ‘생산 강박’이 있다. 20대 시절엔 “창작에 대한 바글바글 끓는 욕망”과 “파들파들 떨고 예민하고 소심하고 우울한 면”이 양쪽으로 강했다. 직장 초년병 시절이었기에 “막 입사한 정치부 기자처럼” 매일 밤새우고 바빴지만 귀가해서 새벽 1시에도 고물 스캐너를 켜서 작업해 1년 365일 매일 만화를 업데이트했다. “광기” 같은 열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독기”가 많이 빠졌다고 했다. 그가 잘 쓰는 단어 중 하나, ‘광기’란 무엇이냐 물으니 이런 답을 내놨다.
“제가 진짜 ‘쭈구리 평화주의자’여서 누구랑 별로 싸워본 적도 없고 되게 겁 많고 소심하고 그렇거든요. 되게 모범생이에요. 근데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이상한 용기를 내게 돼요. (독자들한테서) ‘나도 혹시 저런 면이 있을지 몰라 기대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뿌듯합니다. 그게 제가 늘 표현하는 광기와도 같은 저력 아닌가 생각해요.”(계속)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루나파크><루나의 전세역전> 루나 인터뷰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루나 파크> 2006~2007년 루나 파크 누리집 연재. 첫 작품. 열정과 게으름 사이, 명랑과 우울 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20대 여성 직장인 루나의 생활을 다룬다.
<루나 파크: 사춘기 직장인> 2007~2008년 홈페이지 연재. 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광고 카피라이터 루나의 직장생활과 일상. 직장인의 성장담, 루나의 음식과 여행 이야기 등. <루나 파크>와 <루나 파크: 사춘기 직장인>은 단행본(애니북스)으로 출간됐으나 2024년 현재 절판된 상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2011년 단행본 출간, 2018년 개정판 발간. 영국으로 떠나 8개월간 체류한 기록. 환상 없고 절제된 감성, 가끔 터지는 환희의 폭죽!
<혼자일 것 행복할 것> (2016, 달). 1인가구 세대주로서 루나의 기록. 독립생활의 다디달고 쓰디쓴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 (2021, 미디어창비) 출간 직후 재쇄를 기록한 카피라이터, 만화가, 시인 홍인혜의 언어 에세이.
<우리의 노래는 이미> (2022, 아침달) <문학사상>(2018)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낸 첫 시집.
<루나의 전세역전> 2021년 인스타그램 연재. 2023년 단행본(세미콜론) 출간. ‘전세 사기 100% 충격 실화’라는 부제 그대로. 전세 사기와 역전극. 누가 뭐래도 대표작.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끌어내”…국회 장악 지시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탄핵으로 나갔다 탄핵 앞에 다시 선 최상목…“국정 안정 최선”
“교수님, 추해지지 마십시오”…‘12·3 내란 옹호’ 선언에 답한 학생들
“이재명·우원식·한동훈부터 체포하라” 계엄의 밤 방첩사 단톡방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안 가결…헌정사상 처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키운 한덕수, 대체 왜 그랬나
망상이 현실이 된 12월3일, 가장 바빴을 윤석열의 밤
조갑제 “윤석열 탄핵 사유, 박근혜의 만배…세상이 만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