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닥터 프로스트> 어쩌다 10년 연재?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48.html) ◆
이종범 작가는 언변도 화려하고 악기 연주도 수준급이고 머리도 좋았고 누구를 가르치는 일에도 열정이 지대하다. 이런 재능이 있는데 왜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건가.
“어릴 때 가장 자주 크게 감화돼서 여러 번 울게 한 게 만화였다. 그때 영화에 감화받아 운 적이 많다면 아마 영화감독을 하고 있을 거다. 그게 어떤 느낌이었냐면 만화가 좋은 쪽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으로 느껴졌다. 대사나 장면으로 누군가를 한 번 허물어버리면 그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거잖나. 거기에 매료됐던 것 같다. 실제로 인생의 큰 변화를 전부 만화를 통해서 했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만화가 있었다. 직접 만화를 만들어 내가 느낀 것들을 남들이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전능감을 느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을 위해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달린 게 10대였고, 뒤늦게 만화만이 전능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에 매료돼 웹툰 작가가 된 사례가 많다. 어린 시절 만화가의 꿈을 키운 계기가 무엇인가.
“어머님 친구분께서 하는 서점에 5살 때쯤부터 드나들며 서점에 있는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용소야> <권법소년> <쿤타맨> 시리즈 같은 것들을 독파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제야 친구들은 <드래곤볼> 이야기를 하더라. 초등학생 때 난 이미 만화 조기 교육을 받은 엘리트 덕후였기 때문에 반 전체에 <드래곤볼>이 돌며 인기를 끌 때 <드래곤볼>의 한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그때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느꼈다. 8살짜리 이종범에게 친구들의 칭찬은 만화에 인생을 걸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10대 내내 만화만 보고 살았다. 친구들에게 인정받았으니까 더 잘하고 싶어서 만화를 더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운 좋게도 걸작들을 만나 만화가 더 좋아져버렸다. 만화가로서의 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외부에 있다가 내재화했고 유통기한이 짧은 이유로 시작했다가 더 긴 유통기한의 이유를 만드는 식으로 변화하면서 꿈이 단단해졌다.”
이종범 작가가 여러 분야를 잘해서 주변인들이 품는 오해라고 생각되지만 ‘이렇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만화에 진심일 리 없다’고 보는 왜곡된 시선도 있지 않았나.
“카툰 부머 초창기에 술자리에서 지금도 친한 동료가 내 지갑을 구경하다가 학생증을 발견하곤, “너 연대잖아. 왜 만화 그려?” 하고 건넨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이 비문 같았는데 마치 “너 남자잖아. 왜 만화 그려?”처럼 들렸다고 할까. 오히려 나에게는 언변 좋은 연세대 심리학과 졸업생 등등의 스펙을 다 끌어모아도 초라하게 여겨졌다. 전공생도 아니고 만화를 그린 경험도 없이 만화가를 하려는 거니까 경쟁력 없는 경력을 가졌다고 느꼈는데 나와는 반대로 생각한 거니까 의아했다.”
워낙 다재다능하다보니 왜 굳이 웹툰을 그리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 같다.
“나에게 웹툰 작가는 직업윤리를 갖춘 프로페셔널 직업인 동시에 내가 추구하는 완벽한 삶의 태도 같은 라이프스타일의 일종인데 태도는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보이기 어려워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 외의 것들은 충분히 할 수 있고 재미있어 보이고 돈이 벌리는데 안 할 이유가 없어서 한 것이다.”
웹툰만 잘 만들기도 힘든데 밴드 활동이나 휘파람 싱글 앨범 발매 활동 등 여러 분야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프로페셔널한 성취까지 이루기는 쉽지 않다.
“웹툰을 만들 때 잘한다는 느낌이 희박하다. 주변에 만화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10대 때는 우리 학교에서 내가 만화 왕이었는데 지금 내 동료 작가들과 함께 있으면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보람이 있지만 자기 효능감은 아주 천천히 풍화된다. 그래서 편안하게 힘 안 들이고 인정받을 수 있는 활동으로 자기 효능감을 채운다. 악기 연주, 말만 하면 되는 방송 이런 것들이 내 효능감을 채워준다. 나라는 인간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의 삼발이를 어느 한쪽이 과하게 짧아지지 않도록 계속 미세 조정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 관심과 취미가 많은데 즐기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능숙하게 잘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능숙함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능숙한 게 멋있다고 생각한다. 미숙함은 사랑스럽지만 능숙함은 멋있다. 남들 눈에는 전문적인 행동인데 본인은 마치 커피를 타듯 일상적으로 하는 그런 종류의 느낌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척척 능숙하게 해내는 것을 통해서 자유를 느끼고 안전함을 느낀다.”
교육에 계속 종사하는 것도 능숙함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됐나 아니면 자기 효능감 유지를 위한 것인가.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이 나의 절반을 구성하고 있다. 영감을 주는 행위라는 면에서 교육과 작품을 만드는 것은 똑같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로 하는 수업은 동기 부여해서 하고 싶게 만들거나 깨닫게 하는 거다. 어릴 때 만화에 영감을 받아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성장했던 것처럼 교육으로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이종범의 삶의 목표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서 웹툰이란 도구로 실천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 이종범이 좋은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기획 의도로 작품을 만드는지 궁금하다.
“후자가 더 멋있어 보이는데 전자다. 최근에 배운 용어인데 ‘비저너리’라는 단어가 있더라. 비전을 공유하거나 심어주는 사람을 표현하는 용어인데 나는 그걸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웹툰을 만들기도 하지만 교육과 유튜브 등 말하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거다.”
작가 이종범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현대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을 쓰려고 계획 중이다. 올해 안에 연재에 돌입할 수 있을 만큼 원고 작업을 해서 쌓아두려고 한다.”
앞으로 이종범 작가가 무엇을 만들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테마가 있나.
“자기 이해에 대한 이야기는 <닥터 프로스트>에서 많이 했으니 이젠 그만해도 될 것 같다. 자기 이해 이후의 단계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을지를 고민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문제 해결에서 오는 쾌감을 주 무기로 삼아서 스토리를 전개하고 큰 틀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다.”
여러 가지에 관심 갖고 잘하고 싶지만 그중에서 가장 잘하고 싶은 건 만화인가.
“지금은 만화를 그리며 받은 나름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고 재밌게 작품을 만들 준비를 하는 재활 기간이라 만화가 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제일의 무기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고통스럽지 않다는 건 정체돼 있다는 뜻이다. 고통스러워야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걸 머리로 이해하지만 그 고통에 쉽게 뛰어들고 싶지 않은 마음도 남아 있다. 또 다른 일들에 비해 노력한 만큼 쉽게 보상을 주지 않는 분야가 만화라서 대답을 선뜻 못하겠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래도 다른 어떤 것보다 만화를 제일 잘하고 싶다.”
앞으로 사람들이 이종범을 떠올릴 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만화 그리는 할아버지. 필요에 의해 그리는 게 아니라 그저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는 만화가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홍난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익히 알고 있는 사람과의 인터뷰는 익숙해서 찾지 못한 낯선 면면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종범 작가와의 인터뷰가 그랬다. 2016년 대학에서 임용 동기로 만난 그와 6년을 일했으므로 이종범이란 사람과의 작업에서 얻은 어려움과 기쁨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와 인터뷰하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특히 그가 <닥터 프로스트>를 연재하며 느낀 고통의 깊이는 나의 이해를 뛰어넘었다. 그의 만화에 대한 사랑의 종류는 지고지순한 순정이었는데 그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상처 입었단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연재란 본래 힘든 일이라고만 받아들였을 뿐 그 깊이까지는 몰랐다. 그제야 이종범 작가가 <닥터 프로스트> 완결 후 다른 활동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이해됐다. 깊이 사랑한 대상에게 받은 상흔을 지우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말이다. 아직도 회복 중인 그가 제발 만화를 계속 그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었다. 동료이기에 앞서 독자로서 이종범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를 꼭 만화로 읽고 싶기 때문이다. 이종범 작가에게 가장 열심히 노력함에도 그만한 보상을 주지 않는 게 만화지만,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바라는 만큼 보상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맞이하는 것. 그래서 인터뷰를 끝내면서 그가 다시 웹툰을 만들 것이라 확신했다. 이종범 작가가 만화를 사랑하는 건 ‘진심’이니까.
<소왓툰> 2008년 재즈 잡지 <재즈피플> 연재. 밴드 드러머로 활동한 작가 경험을 살린 재즈음악 소재의 만화.
<투자의 여왕> 2009년 <스투닷컴> 연재. 재테크, 투자라는 경제 지식을 세 명의 캐릭터를 통해 전달하는 작품.
<시그넷> 2017년 <버프툰>(구 NC코믹스) 연재. 영생을 꿈꾸는 소년이 낙원이라 여겨지는 세계에 의문을 품으며 진실에 다가가는 내용의 에스에프(SF) 액션 웹툰.
<닥터 프로스트> 2011∼2021년 네이버웹툰 연재. 2011년 독자만화대상 온라인만화상, 2012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21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타인의 심리를 꿰뚫는 천재 심리학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총 4개 시즌으로 구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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