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지느러미’ 포스터. ㈜에무필름즈 제공
“내용은 모르겠고, 이미지는 센데, 인물한테 이입이 안 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시절 박세영 감독이 자주 들었던 피드백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서사가 부재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매일 해 질 녘 뒷산을 산책하는 아빠를 담은 4시간짜리 졸업작품의 12시간짜리 가편집본을 가져가자, 교수는 “이건 영화가 아니다”라며 퇴짜를 놓았다. 오기가 생겼다. ‘기승전결이 있어야’만 영화라고 한다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드리리. 그렇게 급하게 만든 단편 ‘캐쉬백’으로 2019년 제18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미쟝센 편집상을 받았다. 첫 수상이지만,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는 길을 벗어났을 때 오히려 세상이 반응하다니. 그 간극 속 혼란을 견디며 계속 찍었다.
박 감독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1800만원의 제작비로 찍은 첫 장편 ‘다섯 번째 흉추’를 내놓고다. 2022년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엔에이치(NH)농협 배급지원상, 코리안판타스틱에서 장편 관객상과 장편 감독상을 받았고, 같은 해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독일 베를린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 초청도 받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들을 제작한 프로듀서 필리프 보베는 사라예보영화제에서 만난 박 감독에게 차기작을 물었다. “‘지느러미’가 곧 촬영에 들어간다”고 답했다. 촬영이 끝날 때쯤 보베에게서 연락이 왔다. “보여줄 수 있냐.”

박세영 감독
가편집본을 본 보베가 함께 작품을 마무리 지어보자고 제안했다. 정말일까, 의심스러웠다. 26살 무명 감독이 고작 3천만원으로 찍은 영화를? 유럽 아트하우스 거장의 속내는 무엇일까? 의구심을 안고 베를린으로 넘어간 그는, 6개월 동안 하루 18시간씩 꼬박 편집에 매달렸다. 편집 과정에서 보베와 이견을 보일 때도 많았다. ‘이 대사를 후시녹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영화를 훨씬 더 쉽게 이해한다.’ ‘관객이 멍청이냐. 이런 대사 없이도 관객이 유추하는 영화여야 하지 않나?’ 그렇게 고집이 뜯겨나가며 함께 설계한 영화 ‘지느러미’는 프랑스 선개봉을 거쳐 2026년 7월23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렇게 완성된 최종 편집본에 만족하십니까?
“최종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좀 전에도 소설 ‘내 휴식과 이완의 해’를 읽다가 이렇게 바꾸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첫 문장만 읽어도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는 알겠는데 왜 그랬는지는 감춰져 있어서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도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을 어디에 배치하는지에 따라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뜬금없지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신파가 되기도 하잖아요. ‘지느러미’에서도 장면들이 계속 가변적으로 꿈틀거리는데, 이걸 어디로 옮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모호함을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관객이 거북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어요.”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 위해 이 영화를 어떻게 권유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하는 게 제가 영화를 제작하는 목적은 아닌 것 같아요. 애초에 그러기 위해 만든 영화도 아니고. 하지만 누군가 우연히 아무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봤는데, 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마음에 와닿는 지점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세계적인 감독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작을 편집하던 베를린에서의 작업 환경은 어땠나요?
“편집실에서는 누가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냥 서로의 체취를 맡아가며 밥 시켜 먹을 때 누구는 인도 요리 먹었구나, 왜 설거지 안 하고 가지? 뭐 이런 느낌이었어요. 멀리 있을 땐 동경했으나, 가까이 있으니 어쨌든 다 같은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구나….”
―‘지느러미’는 어떤 감정에서 출발한 영화인가요?
“할머니가 코로나로 돌아가셨어요. 당시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때라 정부의 방침대로 전통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채 바로 화장해버렸죠. 가족에겐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사회적 시스템과 마찰하며 느낀 감각들, 그리고 서로를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이삼 년간의 정서 흐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초기엔 서사가 부재한 채 망한 한국을 계속 걷고 시선을 교환하며 방황하는 영화를 떠올렸고, 그 안에서 ‘지느러미’ 특유의 컬러와 거친 질감이 나오게 됐습니다.”

영화 ‘지느러미’ 스틸컷. ㈜에무필름즈 제공
―영화의 ‘질감'이란 무엇인가요? 화면이 꽤 자글자글하고 독특하던데요.
“디지털 영화에서 질감은 무언가 ‘부족하고 부재할 때' 발생합니다. 아이폰으로 밤에 촬영할 때 빛이 부족하면 카메라가 어떻게든 잡으려고 발악하면서 지글지글한 노이즈가 생기잖아요. 완벽하게 클리닝된 아이돌 영상이나 티브이(TV) 드라마에는 질감이 부재하죠. 반면 좀더 민주적이거나 가난한 이미지에서 질감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3천만원이라는 제작비 한계가 오히려 그런 질감을 만들어낸 셈이네요.
“맞아요. (유럽 제작사가 붙으며 예산은 커졌지만 초기엔) 3천만원으로 장편을 찍으려면 7회차 만에 90분을 뽑아내야 해요. 테이크를 많이 가져갈 수도 없으니 애초에 완벽하고 구조가 탄탄한 영화인 척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메가커피 마시면서 찍고 있는데, 스타벅스에서 찍는 것처럼 깨끗하게 꾸미는 건 거짓 같았거든요. 스태프가 처한 형편에 맞는 질감이 영화에 존재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조명도 없는 옥상에서 어둡게 찍은 장면이 있었는데, 후반 작업 때 색을 억지로 밝히니까 이미지가 엄청 자글자글하고 못생겨지더라고요. 그걸 숨기지 않고 영화의 정체성으로 가져갔죠.”
―각본·연출·촬영 중 특히 ‘편집’이 가장 좋다고 하셨는데, 비결이 있나요?
“과거 15초짜리 광고를 찍을 때 클라이언트가 만족하지 않아 700개 이상의 버전을 만든 적이 있어요. 100차쯤 되니 정답을 알 수 없어서, 하지만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해야 하다보니 수행처럼 하게 되고 수동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내가 감각하는 이미지, 최고의 조립 방식이라 믿었던 박자감, 인간 소통 방식까지 의심하게 되니까 뭔가를 놔버리게 됐는데, 그 반복 속에서 지치면서도 묘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많이 배웠어요. 내가 노력했다고 생각한 것은 진짜 노력이 아니었구나. 700번 이상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구나.”
―창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건넨다면?
“미디어가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는 지금, 돈은 없지만 독립영화를 만들고 싶은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만드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한 작품을 10년 동안 고심해서 만드는 것도 의미 있지만, 너무 가차 없이 스크롤 다운되는 것 같거든요. 어쨌든 승부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부담을 덜 느끼고 계속하는 것이지 않나. 그게 정답은 아니지만 저는 그러려고 합니다.”
―앞으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지속 가능한 창작 생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분은 홍상수 감독인데, 저는 캠코더 하나만 들고 미니멀하게 갈 배짱은 없어서 최대한 다양한 영화를 많이 찍다 죽고 싶습니다. 현장에 있는 것도 즐겁고, 다음 작품 준비하는 것도 즐겁고, 투자받는 것도 즐겁고, 투자 못 받는 것도 즐겁고, 편집하다가 싸우는 것도 제겐 다 즐거운 과정이거든요.”
―투자 못 받으면 왜 즐거워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어서요. 만약 못 찾더라도 어쨌든 정답은 없는 것 같아서요. 그냥 계속 만들려고 하는 게 즐거운 것 같아요.”

영화 ‘지느러미’ 스틸컷. ㈜에무필름즈 제공
영화를 만들며 남은 부끄러움은 다음 영화의 원동력이 된다. 서둘렀던 마음을 누르고 좀 덜 다혈질적으로 만들겠다며 벌써 다음 장편영화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 갔는가?’의 편집을 마무리 중이라는 박세영. 하지만 그런 급한 성질마저 지금의 그를 만든 최고의 장점이다. ‘지느러미’를 마주하게 될 소수의 관객이 느낄 감각을 궁금해하며, 자기혐오가 가장 부재하다는 그의 다음 행보를 기다려본다.
■ 박세영 감독의 플레이리스트
1. Ryota Kuwakubo ‘Lost’ at Aspinwall House - Kochi-Muziris Biennale 2014
https://youtu.be/HuEeIud3DTk?si=rRQQ7tHqOW8CuYdd
이 영상을 처음 본 지 8년은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애정하는 문혜진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처음 봤는데, 단순하고 재밌고 유쾌해서 꾸준히 보고 있습니다.
2. Drongo Bird Tricks Meerkats | Africa | BBC Earth
https://youtu.be/tEYCjJqr21A?si=G2N3FXbeGhCV1HcO
내레이션부터 편집과 컷 구성이 흠잡을 데 없는 정말 유쾌한 영상입니다.
3. Camera falls from airplane and lands in pig pen--MUST WATCH END!!
https://youtu.be/QrxPuk0JefA?si=CvTxR-xERodhYDjL
최고의 1분짜리 영화.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김수진 소셜저널링 ‘66데이즈’ 대표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5·18 성역” 논란 이병태 결국 사퇴…청 “사의 수용” [속보] “5·18 성역” 논란 이병태 결국 사퇴…청 “사의 수용”](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706/53_17833289400121_20260706503061.jpg)
[속보] “5·18 성역” 논란 이병태 결국 사퇴…청 “사의 수용”

청와대, ‘5·18 성역’ 버티는 이병태에 사퇴 권고…“사안 매우 엄중”

배재고 “깊이 반성” 광주일고 “멋진 승부할 날 오길”…5·18묘지 참배도

“5·18 성역” 이병태 자진사퇴 일축…박지원 “빨리 사라져라”

‘졌지만 잘 싸운’ 카보베르데 선수단 금의환향…온 나라가 축제!

청와대 “호남 반도체 산단, 광주 군공항 부지에 조성 결정”

배재고 ‘응원 화환’ 이진숙…“학생들은 성숙하게 사죄, 부끄러운 눈으로 보라”

이준구 “대학교수까지 한 이병태, 자유와 방종 구별 못 해” 작심비판

법원, 모스 탄 2차 출국정지 집행정지 신청도 기각…“공공복리 영향 우려”

배재고 야구부 자필 사과문 “인성 중요성 깨달아…반성하며 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