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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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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차 주부 작가, 살림 그리는 낭만<플랫 다이어리> <주부 육성중> 임현

임현②―일상 속 ‘대가 없는 호의’ 발굴하는 로맨티스트
등록 2024-05-25 00:51 수정 2024-05-27 00:26
임현 작가 <주부 육성중> 중 1회에서 소방관인 육성중이 등장하는 장면.  주인공 등장 장면이 인상적이다. 네이버웹툰 제공

임현 작가 <주부 육성중> 중 1회에서 소방관인 육성중이 등장하는 장면.  주인공 등장 장면이 인상적이다. 네이버웹툰 제공


◆<플랫다이어리> <주부 육성중> 임현 작가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프로주부’ 향한 존중 담고 싶었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53.html

웹툰 플랫폼에도 낭만은 있다

작품의 무대인 ‘마음빌라’에 등장하는 집주인, ‘마음’씨의 존재가 독특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웃’의 개념이 희미해진 시대의 사람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요즘 인터넷에서 오가는 말을 보면 ‘이웃과 친해지지 말 것’을 원칙처럼 생각하고 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마음빌라에 들어가면, 마음빌라의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속절없이 무장해제될 거라고 저는 믿거든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개념이 있는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거예요. 보시를 하는 것이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인데, 어떻게 그 호의가 꼰대겠냐는 거죠. 바라고 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사실 느낄 수 있잖아요. 특히 ‘남들과 가까워지지 말라’는 원칙 같은 것에 함몰돼 살지 않으면 그 호의가 바라는 게 있어서 주는 호의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고 믿어요. ‘대가 없는 호의’는 사실 제가 연재하면서 느낀 거기도 해요. 물론 직원이라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돈만 보는 플랫폼’이라면 주부의 이야기를 싣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공간을 비워두는 낭만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호의가 일상인 주부에게 ‘직업’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어색하다고 생각해보지를 못했어요. 주부가 직업이냐 아니냐를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시니컬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러시군요’ 정도로 여기는 편이에요. 만약 그런 사람이 제 주변에 있다면, 조리병을 예로 들 것 같아요. 같은 군인이라도 조리병은 군인이 아니냐, 군인이잖아요. 그것도 정말 힘든. 저는 공무원이 사회에서 일종의 주부 역할을 맡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다만, 제가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너무 편의적으로 사용한 것 같아서 소방관분들께 죄송할 때가 많아요.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모두가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이니 주인공의 직업으로 활용했거든요. 육아휴직 얘기도 이렇게까지 작품에서 길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육아휴직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구조가 있는 거잖아요. 막연한 비판보다는 그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슬기라는 캐릭터를 통해 육아휴직을 하는 게 낭떠러지에 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사 업무 말고 다른 일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요. 보고 계신 많은 독자분들도 그럴 거라고요.”

사랑받는 악당은 만들기 싫어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작품 속에서 ‘악인’은 ‘돈! 돈!’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매몰된 사람이 나빠진다고 얘기하고 계신 것 같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 없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거든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고. 그런데 이건 전적으로 제 능력 부족이에요. 어떻게 악인을 넣을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예 애정을 주지 말자고 생각했거든요. 현실에 붙어 있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만큼, 현실에서 벗어난 ‘관념적인 악당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웹툰을 다 보고 나면 다 휘발돼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사랑받는 악당을 만들기는 싫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만든 악당이 나올 때 조회수와 매출이 높아지더라고요. 악당 캐릭터를 구상할 에너지를 좋은 이웃에 대해 좀더 고민해보는 데 쓴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제가 어떤 이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희 아이가 태어나고 조리원 다녀오니까 ‘애기 나왔어요?’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아셨나 여쭸더니 ‘택배가 와 있어서요’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런 게 좋아요. 부부만이 아니라 이분들도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자라나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봐주시겠구나. 저희 동네엔 아이가 없어서 정말 슈퍼스타거든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나는 어떤 이웃인지를 먼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아쉬운 지점도 있어요. ‘마음빌라’에 그려지는 가족이 모두 소위 ‘정상 가족’이라는 것.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LGBTQ+, 다문화가정들도 주변에서 보고 이웃으로 살고 있지만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그냥 사람 사는 거니까요. 그런데 제가 그걸 집어서 보여주는 것은 제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작가로서 책임을 회피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뤄주는’ 느낌을 주기보단 다루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님 작품은 모두 ‘대사가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대사를 쓰셨는지 궁금해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썼던 것 같아요. 깊이 생각하고 썼다기보다 마감이 다가오고 있으니 마음 가는 대로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릇 좋은 작품이란, 상징적인 대사 없이도 작품의 주제 의식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능력이 많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계속 대사로 강조하고 짚어주는 느낌이라서 조금 부끄럽기도 해요.”

냉담한 눈보다 따뜻한 눈
선한 웃음을 가진 임현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선한 웃음을 가진 임현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끝으로, <주부 육성중> 후기에서 “쉽게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는 작품을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하기 전에도 고민을 좀 했어요. 이렇게 말해버리면 또 결이 다른 작품은 하기 어려워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주부 육성중>을 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할 거라는 강한 확신을 얻었어요. 세상을 냉담한 눈으로 보면 불만도 많아지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반대로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주변의 이야기, 자기가 받았던 호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또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도 독자분들께 그런 시선으로 살고 있다는 걸 작품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재민 웹툰평론가·만화문화연구소장

에필로그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임현 작가의 <주부 육성중> 중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임현 작가가 그린 두 작품은 호화로운 세상이나 환상이 가득한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플랫다이어리>에서는 평범한 청년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부 육성중>에서는 1++ 소고기 등심을 지방이 많다고 조각내는, 주부와 거리가 먼 ‘시베리아 불곰을 닮은’ 남자의 시선에서 주부를 바라본다. 시나리오 작법을 다룬 <스토리>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매키는 “이야기는 삶의 은유”라고 말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은, 그 일을 겪어본 사람에겐 일상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놀라움이 될 수 있다. 임현 작가는 사람의 시선에서, 일상 속에 공기처럼 깔려 있어 ‘새롭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낸다. 덩치 큰 남성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작가는 자신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것을 고민한다. 그런 고민은 언제나 귀하다. 그 때문에 <주부 육성중>은 2023 오늘의 우리만화 최종 후보 15작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흔히 현실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로 쉽게 벌어지지 않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낭만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임현의 작품은 그래서 낭만적이다.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 그렇지만 모두가 ‘쉬워야 한다’고 말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지 않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어쩌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남을 탓하는 것이 가장 쉬운 세상에서, 그러지 않기로 고민했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임현은 웹툰 시장에서 흔히 ‘상업성과 거리가 멀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을 했다고 자조하지만, 동시에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로 플랫폼이 선택한 것은 일종의 낭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가진 삶에 대한 태도 역시 그렇다. 작품이 보여주는 낭만을 닮아가기 위한, 작가 임현이 보여주는 또 다른 낭만을 기대하게 된다.

작품 목록

<플랫다이어리> 2019년 3월3일~2020년 2월9일 네이버웹툰 연재. 해시태그(#)를 붙여 남이 보는 일기를 쓰는 시대, 나를 잃어버릴까 무서웠던 ‘나’의 시선으로 담아낸 샵(#) 대신 플랫(♭)이 붙은 일기장 같은 만화.

<주부 육성중> 2022년 4월12일~2023년 10월10일 네이버웹툰 연재. 집안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배워나가는 소방관 육성중씨가 ‘주부’로서 살아가는 삶을 자각하게 되는 이야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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