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지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이 생각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첫인상은 며느리라는 이유로 겪는 부당한 처사에 화를 내는 주인공 ‘사린’의 얼굴(<며느라기>)이었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막춤을 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는 모범생 ‘아랑’의 얼굴(<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좋아하게 됐다. 서로 다른 표정이 주는 각각의 재미와 위로가 있었다. 그의 작품이 좀더 다양한 얼굴로 읽히길 바라는 이유다. 아직 날이 차던 2024년 3월30일 저녁, 서울 지하철 6호선 대흥역 근처 카페에서 작가가 다정한 마음으로 사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이에 두고 대화했다.
<며느라기>가 연재된 지 7년이나 지났다는 말에 수신지 작가도 놀라움을 표했다. <며느라기>는 2017년, 페미니즘이 활발히 대중화하던 시기에 연재된 ‘며느리를 위한’ 만화였다. 실존 인물처럼 만들어진 주인공 ‘민사린’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만화가 게시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가장 현재적인 주제가 현재적인 방식으로 연재되며 크게 이목을 끌었던 작품은 이후 ‘낙태법’과 출산, 양육 문제를 그린 <곤>(2019)으로 이어지며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며느라기>의 작업기를 담은 코멘터리 북 <노땡큐>(2018) 또한 사이드 스토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에 응답해주었다. 그런데 그것들도 2019년까지. 그 후로 5년이나 흘렀으니, 지난 7년간의 변화를 새로이 들을 때가 됐다.
“<며느라기>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제사에 며느리가 안 가는 게 좀 이상한 분위기였어요. 근데 지금은 제 주변에도 안 가거나, ‘명절날 공항에 사람들이 많다’ 이런 뉴스도 많이 나오잖아요. 남편 집에 먼저 갔으면 설날엔 여자 집으로 간다거나 하는 등 갈등을 조율하려는 시도도 많고요. 연재 당시에는 댓글을 통해 ‘그래도 할 도리는 해야 하지 않냐’는 반응이 많았거든요. 명절에 대한 변화는 확실히 좀 느껴지더라고요.”
7년이란 시간이 지난 만큼 실제 사회의 풍경이 제법 변했다. 부부가 함께 시가를 먼저 방문하는 명절의 풍습이 ‘도리’라 할 만큼 당연한 것은 아니게 됐다. 수신지 작가의 일상 역시 한 걸음 더 변화했다. 시가와 친정을 번갈아 가길 시도했던 작가는 몇 년 전부터는 아예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가족과 명절을 난다. 그리고 자녀가 당연히 남편 성을 따르는 것에 대해 “가끔 생각”하면 “화가 나”(노땡큐, 83쪽)던 작가는, 얼마 전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 참여해 성본 변경을 신청하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밟아온 서서한 변화의 발걸음은 그 자체로도 눈에 띄었지만, 수신지 작가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이 함께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어머니 성으로 내 성을 바꾸는, 그 취지에 너무 공감해서 저도 이번에 법원에 청구했거든요. 지금은 보정 명령까지 받은 상태인데, 엄마가 그걸 하는 과정에서 굳이 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결국에는 내가 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비슷한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 네가 <며느라기> 작간데 해야지, 뭐.’(웃음)”
추석에 시가에 가지 않는 일에 관해 의견을 묻자 작가의 어머니는 전에도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며느라기> 그리는 작가인데 너는 명절에 시댁 가서 전 부치고 남들한테는 그러지 말자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런 점에서도 이해를 하려고 해.”(<노땡큐>) 어머니를 비롯해 남편과 시어머니와 나눈 세 편의 인터뷰는 <노땡큐>에서 특히나 눈에 띈다. 자신의 작품을 두고 가족들과 가감 없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내와 며느리로서 겪는 부당한 상황을 그린 <며느라기>를 관계의 당사자들이 읽는다니,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먼저 들었던 생각은 작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긴밀하게 엮여 있는 모습이 그의 작품과 꼭 닮았다는 것이었다. 실제 결혼 생활을 통해 경험한 이질감을 <며느라기>로 엮어내고, <며느라기>를 본 어머니로부터 작가와 딸로서 동시적인 지지를 얻는 것. 작가는 그런 어머니에 대해 “그 작업 자체가 좋으셨던 건지 아니면 그걸 통해 제가 좀 알려지는 그런 모든 상황을 좋아하셨던 건지”는 모르겠다며 담백히 말했지만, 내게는 꽤 진정성 있게 들렸다. 그 지지와 이해야말로 수신지 작가가 <곤>에서 말했고 <며느라기>에도 반영됐을, 이야기를 향한 작가의 믿음을 증명하는 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법이지만 법을 바꾸는 건 사람이고, 가끔은 이야기가 사람을 바꾸니까. (…) 만화는 GONE으로 시작해서 GO ON으로 끝냈다. 나는 그 부분이 마음에 든다. 사라질 줄 알았지? 조용히 있을 줄 알았지? 우리는 계속 말하고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곤>, 작가의 말)
비록 <곤>이 담아냈던 ‘낙태죄’ 문제는 위헌판결이 무색하게 수년이 지난 지금도 변화가 지지부진하지만,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파동이 어쩌면 내 비관보다는 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라는 낙숫물이 바위를 깰 만큼 강력하진 않을지 몰라도, 물 위에 떨어져 그려내는 파동은 생각보다 넓게, 더 멀리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살포시 마음이 열린 채 다음 질문으로 향했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 <며느라기> 작가 수신지의 인터뷰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소소한 애태움을 그리는 도전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1.html)
<3그램> 2010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창작만화 지원작으로 선정되며 독립출판 형태로 소량 제작. 스물일곱의 암 투병기를 그려낸 자전 만화. 일러스트를 그리던 작가가 만화를 그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스트리트 페인터> 2015년 올레마켓에서 6개월 동안 연재. 미메시스에서 단행본 제작. 미대 졸업반인 아랑이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만화. 이 작품 역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며느라기> 2017년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연재. 2020년 11월 카카오페이지에 개정판 동시 업로드. 2017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 만화가 협회장상, 2018년 올해의 성평등문화상 수상. 평범한 ‘며느리’ 민사린이 가족 안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차별과 폭력을 그린 만화. 평범하게 단란한 가족이기에 보편적이고, 보편적이기에 더 설득력 있다. SNS를 통한 파격적인 연재 형식으로 더욱 화제가 된 작가의 대표작이다.
<노땡큐> 2018년 귤프레스 단행본 제작. <며느라기>의 작업 과정과 단행본 출간 이후 연재된 명절 특별편이 담긴 코멘터리 북. 가족과의 인터뷰와 비평문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곤> 2019년 귤프레스 단행본 제작. ‘낙태’한 여성을 소급까지 해 적극 처벌하는 가상의 사회를 그린 만화. <며느라기>에서 미처 못 다룬 출산과 육아 문제를 다룬데다, 아주 비슷한 온도의 분노로 독자를 들끓게 한다는 점에서도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2011년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같은 제목의 단편 만화를 확장한 만화. 특별한 일탈보다는 모범적인 생활이 익숙한, 평범한 고등학생들을 그렸다. 곧 4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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