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12일 216수를 끝으로 <미생> 시즌 1·2의 긴 여정이 끝났다. 2012년 1월 미디어다음에 웹툰으로 연재를 시작한 뒤 12년이 걸렸다. 3월14일 경기도 성남 분당구청 옆에 있는 윤태호 작가 작업실에 들어서며 긴 연재를 끝낸 소감을 물었다. 완결하면 딱 일주일만 쉬고 바로 다음 편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는 그는 마지막 원고를 보낸 뒤 아내와 집에서 술 한잔하며 완결 자축을 끝냈다고 했다.
그는 시즌3 이야기를 한다. 이미 2회분 원고를 끝낸 상태다. <미생>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장그래가 주인공인 새로운 멀티버스(평행우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평행우주에 사는 장그래가 종합상사가 아닌 다른 곳에 취직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하니 흥미롭다.
<미생> 시즌1이 끝나고 시즌2를 완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미생> 시즌1 할 때는 시즌2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시즌1에서 장그래가 요르단 관련 프레젠테이션(PT) 하는 대목이 있는데(시즌1 87수와 88수), 그 원고를 준비하면서 시즌2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회사에서는 비리가 있는 사업은 포기합니다. 그러면 다른 회사에서 그 사업을 가져가 수익을 내요. 그걸 임원들에게 두괄식 PT로 발표하는데, 포기한 사업을 다른 회사가 가져가 얼마나 수익을 냈는지 보여주는 것이지요. 비리 때문에 골치 아프니 포기하는 의사결정을 했던 임원들에게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임원 입장에서 비리가 발견된 사업은 여러 이해관계가 있어 복잡해지고, 그래서 포기하는 것이 회사의 문화이자 관행이기 때문에 영업3팀의 PT가 불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장그래의 설명을 듣고 난 임원들은 마음이 바뀌고, 사장의 질문에 답하는 신입사원 장그래를 보며 자신들의 한때 젊었던 모습을 확인하기를 바랐어요. 이 대목 때문에 시즌1의 87수와 88수가 가장 반응이 좋았어요. 포기했던 요르단 프로젝트를 되살리기는 했지만,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은 그 사업을 하지 못할 겁니다. 전문적인 팀에 재배치되지요. 그러면 애정을 갖고 파헤쳤던 요르단 프로젝트를 하지 못하게 된 영업3팀은 신사업을 구상해야 하는데, 내부고발 전력 때문에 다른 팀이 협조하기가 쉽지 않아요. 다른 팀들이 볼 때 내부고발은 어쩌면 조직을 배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독립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이때부터 시즌2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미생> 시즌2는 시즌1과 많이 달라요. 시즌1이 대기업 원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시즌2는 중소기업인 온길인터내셔널이 중심인데, 중소기업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즌1 할 때 아쉬웠던 것이 있어요. 원인터내셔널이 대기업이라 이야기할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대기업 회장님댁을 엿보는 느낌 같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 같았어요. 대기업의 문화와 그들의 생각, 생활, 욕망 등을 공감하기보다는 소비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시즌2는 중소기업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상하게 됐어요. 물론 대기업보다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대기업만 다룬 <미생>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시즌1에 대한 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요. 세상을 공평하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그래야 <미생>이 마무리될 것 같았어요.”
세상이 공평하길 바라는 마음이라면 <내부자들>처럼 대기업을 통해 음과 명을 심화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미생>은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보다 일하는 사람에 대해 집중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회사나 조직에 들어가면 당연히 일은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일을 잘한다는 건 여러 가지 능력을 키워야 가능해요. 또 무조건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미생>에서는 조직 속의 개인과, 개인이 만드는 조직이 ‘일을 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고 싶었지요.”
요즘 ‘1960년대생들의 퇴직과 노후’라는 화두가 사회적으로 거론됩니다. 시즌2 온길인터내셔널 시니어들의 고군분투가 바로 그런 면을 제대로 다루고 있더군요.
“시즌2에서 중소기업은 회사를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를 다루고 있어요.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진짜 무서운 일입니다. 나도 회사를 몇 개 만들어보고 실패도 하고 그랬어요. 남이 내가 만든 회사에 이름을 얹어놓는다는 것은 너무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온길인터내셔널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런 긴장감으로 시작됐지요. 실제 작품을 만드는 내 입장에서는 시즌1보다 시즌2가 훨씬 아기자기하게 재미있었어요. 시즌1은 비정규직 장그래가 미생으로, 정직원이 되느냐의 문제를 다룬 깔끔한 이야기지요. 그에 비해 시즌2는 중소기업인 온길인터내셔널이 미생 그 자체입니다. 중소기업이 발 붙이고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미생이라 생각했어요. 이 회사의 주주이자 책임자들인 시니어들의 이야기가 중심일 수밖에 없지요.
50대가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시기잖아요. 아이들도 아직 자립을 못한 시기고, 부모님도 연로하셔서 병원비도 들어가지요. 온길인터내셔널의 시니어들은 대기업인 원인터내셔널에서 퇴직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지위까지 올라갔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겪는 공포도 있어요. 그들의 가족이 겪는 문제도 포함해서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잘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원인터내셔널 천 과장이 장백기에게 술 한잔 마시고 하는 말 가운데 “대기업에서 대체되지 않는 사람은 곧 리스크다”라는 말이 나와요. 큰 회사가 한 명의 대체될 수 없는 사람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면 그 사람의 부재는 곧 회사의 위기이기 때문에 리스크가 되지요. 큰 회사는 붕괴하지 않을 요소를 끊임없이 만들어요. 그래서 어디 하나가 무너져도 대안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에 비해 중소기업은 대체되지 않는 한 명에 의해 움직여요. 마치 우산을 거꾸로 든 것처럼 여러 상황이 위에 있는데, 그게 결국은 사장 한 명한테서 내려오는 구조가 돼서, 사장이 쓰러지면 아무것도 안 되지요. 그만큼 위험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중소기업이 가족 경영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계속)
백정숙 만화평론가
◆<미생> <이끼> <내부자들> 작가 윤태호 인터뷰가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지친 몸과 마음의 폐허를 긁어내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9.html
오래전에 윤태호 작가가 <야후>를 끝내고 슬럼프였던 때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몬스터>를 만든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는 작품을 만들다 막히면 독일로 날아가 취재하고 온다는 얘기를 하면서 부러워하며 한국 만화를 걱정하던 것이 생각났다.
윤태호 작가의 작품에는 전문가들의 조력과 철저한 자료조사로 빛나는 작품이 많다. <미생>을 하면서 전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세티(SETI)>의 한국천문연구원, <어린>의 극지연구소, <미생>의 요르단·가나 대사관과 현장답사, 중소기업 취재를 위한 한국무역보험공사와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인천상륙작전>과 <파인>의 자료조사 등 다양하고도 전문적이다. “내가 땅에 뿌리내린 이야기를 좋아해요. 작업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가볍게 날아가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 재미를 못 느낍니다.”
<이끼>를 연재할 때 웹툰 작가들의 에이전시 회사인 누룩미디어를 만들었다. 회사 시스템을 활용해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작업을 우연에 기대지 않고 예측 가능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가가 전문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생겼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그는 전문가를 취재하러 갈 때 ‘머리는 나쁜데 성실한 중학생’ 정도로 태도를 설정한다. 살짝 아는 것이라도 확실하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방금 말씀주신 부분은 이해가 안 되는데, 쉬운 언어로 다시 설명해주시겠어요?”라고 요청한다. 반복해서 질문하면 진도는 크게 안 나가도 어느 정도 개념은 이해돼 내용을 작품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취재된 것은 캐릭터 연보를 만들고 플롯은 엑셀로 정리하며 작품 속에 윤태호의 것으로 스며든다.
<혼자 자는 남편> 1995년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 연재. 성인 남성들의 성적 상상력을 다룬 작품.
<연씨별곡> 1996년 <미스터 블루> 연재. <흥부전>을 패러디해 놀부와 흥부의 선악을 바꿔 인간의 뒤틀린 면을 보여주는 풍자개그 만화.
<발칙한 인생> 1998년 <미스터 블루> 연재. 본격 지역사회 성인야구 만화. 오장리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30대 백수 박태화와 이발소, 서점, 세탁소, 지역 유지 등이 참여해 만든 야구단 이야기.
<야후> 1998년 만화잡지 < 부킹> 연재. 건물 붕괴 사고로(삼풍백화점 붕괴를 떠올리게 하는)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김현이 수도경비기동대에 입대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사고의 현장을 신무학과 함께 종횡무진하는 작품. 에스에프(SF)적 설정도 있어 판타지적인 세계관까지 갖추고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질문과 분노를 표현 <水上한 아이들> 1999년 만화잡지 <히트> 연재. 수구부 이야기. 매점 누나를 감독 삼아 운동장에서 수구를 하고 양재천에서 연습하며, 비인기 종목인 수구에 매달리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만화.
<이끼> 2008년 만끽→미디어다음 연재.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류해국이 의절한 아버지 류목형의 부고 소식을 듣고 류목형이 지냈던 시골 마을에 등장하며 벌어지는 스릴러. 마을 이장 천용덕을 중심으로 비밀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마을 이야기.
<내부자들> 2010년 한겨레신문 ‘훅’(hook) 연재. 언론인, 정치인, 재벌, 검·경까지 포함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조리를 파헤친 작품.
<미생 시즌1> 2010년 미디어다음 연재. 바둑 프로 입단에 실패한 고졸 장그래가 대기업 원인터내셔널 종합상사 영업팀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해 벌어지는 이야기
<인천상륙작전> 2013년 한겨레신문·네이트 연재.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변화무쌍하던 시기를 다룬 작품.
<파인> 2014~2015년 다음 만화속세상 연재. 1970년대 범죄자들을 모아 신안 앞바다 보물을 도굴하려는 근면성실 악당 이야기.
<미생 시즌2> 2015~2024년 미디어다음 연재. 장그래가 재취업한 온길인터내셔널 중소기업 무역상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리진 시리즈> 2017년 저스툰 연재.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 지식의 본질을 다루는 지식만화 시리즈.
<어린> 2020년 카카오웹툰 연재. 번아웃이 온 작곡가 이이온이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해 벌어지는, 연예기획사와 남극 과학자 간 아이러니한 조화를 다루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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