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이끼> <내부자들> 윤태호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장그래의 우주는 이어진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60.html
지금 대기업을 다니는 주니어들은 사회가 너무 빨리 돌아가는 데 비해 시니어들이 모르는 정보가 많아서 대기업에 연연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장백기나 안영이, 한석율 같은 대기업 주니어들의 고민은 어떻게 가닥을 잡게 되었나요?
“대기업 주니어들은 그래서 잠시 멈추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학업을 계속하거나 미래를 위한 준비를 개별적으로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회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정신 차려보면 늦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대기업의 퇴직률이나 이직률이 높은 이유라고 생각해요. 허영만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 나는 데생을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직접 데생을 다 하기 때문이지요. 보통 데생을 배우고 싶은 문하생은 삼류 작가 화실에 가야 그림 실력을 키울 수 있다고 해요. 기회가 더 많으니까. 그래서 나도 데생을 배우려고 눈물을 머금고 허영만 선생님 문하를 떠났어요. 떠나면서 든 생각은 ‘내가 여기를 어떻게 들어왔는데, 항상 허영만 선생님 보는 건 연예인 보는 것처럼 너무 좋은데, 아버지같이 의지하는 분인데 여기를 나가다니 너무 아깝다’ 였어요.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나온 이후 데생을 배우면서 마냥 유쾌하지 않았어요. 큰 품을 떠난 불안감으로 소외가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원인터내셔널을 다니던 장백기나 안영이, 한석율도 옮기는 스틸마켓 CIC(사내 독립기업)는 원인터내셔널의 계열사라서 토대는 만들어주지만, 구체적인 시스템은 모두 새로 구축해야 하잖아요. 대기업을 떠나는 주니어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장그래가 시즌1에서 원인터내셔널을 떠나며 올려다본 건물을 215수 말미에 3인방도 보는 장면을 넣어서 같지만 다른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직접 회사도 해보고, <미생>을 하느라 회계와 경영을 공부한 뒤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흐름은 어떤가요?
“숫자를 보는 사람은 자기 가치관을 부여하지 않고 숫자로 전반적인 흐름을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운 시대예요. 그래서 누구 한 명이 끌고 가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잘못을 했을 때 자숙하면 넘어갔는데, 지금은 각자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이 너무나 강력해요. 어쩌면 굉장히 뻔뻔해진 사회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똑똑한 사람이 굉장히 많고 자기 논리가 엄청난 시대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헛소리도 많이 해요. 그 와중에 자기 확신도 강하지요. 작품을 발표할 때 옛날하고는 다른 두려움이 좀 있어요. 웹툰 초창기만 해도 작품이 진행되는 과정에 독자들이 공감해주면서 작품에 같이 올라탑니다. 독자들이 즐기는 방법이지요. 감동도 많이 받았어요. <미생> 시즌1 할 때만 해도 독자들이 작품 속에 같이 빠져서 즐겨줬어요. 그런데 지금은 작품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냉정하게 품평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졌어요. 그래서 독자들이 작품을 마냥 좋아만 해주진 않을 것이라는 긴장감과 두려움 같은 것이 생겼어요. 댓글을 보면 상당히 섬세하게 평가해주는 분이 많아 고맙기도 하지만 놀랍기도 해요.”
<미생> 말미에는 장그래가 온길인터내셔널에 개인사업자 연합체를 제안해요. 개인사업자 연합체라는 형태가 흥미로운데, 법인 협동조합을 말하는지, 중소기업의 대안을 제시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온길인터내셔널만의 방향인지요.
“온길인터내셔널이 제시하는 개인사업자 연합체는 중소기업이 나아갈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중소기업은 워낙 다양해서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온길인터내셔널 같은 곳에서는 개인사업자 연합체 형식의 회사를 꾸릴 수도 있다는 의미지요. 이것은 위험부담이 있어요.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직 구조여야 하거든요. 그러나 온길인터내셔널은 제조업도 아니고 무역상인데 7명의 직원은 중소기업치고 많아요. 보통 3인 사업장이 많거든요. 사장은 국외로 영업 다니고, 부인은 경리하면서 회계를 관리하고, 대리 직함을 갖는 사원 한 명은 사장의 영업을 보조하는 일을 하지요. 3명의 인건비가 한 달에 못해도 1500만원 이상 되고, 사무실 월세와 출장 경비, 기타 비용 등을 하면 매달 3천∼4천만원의 비용이 지출됩니다. 이렇게 무역 중심의 7~8인 사업장인 온길인터내셔널에서는 엄청난 매출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문제가 커져서 누구도 책임 못 져요. 현재 다소 성장이 느려지더라도 개인사업자 연합체 형태의 경영 방식이 이 조직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소기업 가운데 무역상들의 특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지요.”
<미생>이 끝난 이후에도 장그래와 온길인터내셔널은 앞으로도 갈 길이 험난할 것 같네요.
“너무 당연해요. 아마도 온길인터내셔널은 장그래가 회사를 접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투자금을 넣었던 주주들에게 투자금을 회수해주는 것으로 정리하겠지요. 서른 중반쯤에 진짜 사장이 되어 장그래가 감당해도 될 정도의 규모를 만들 것 같아요. 김부련 사장하고 오상식 부사장은 나이 먹을수록 현장에서 영업력이 떨어질 겁니다. 그런데 장그래는 그들에게 퇴사하라고 안 하겠지요. 서류 위주의 일이나 전화 통화만으로도 가능한 일들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온길인터내셔널은 장그래 회사가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했어요. 윤태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어린>입니다. 아내와 아들도 <어린>을 가장 좋아해요. 아들은 코로나19로 열흘 동안 나랑 같이 작업실에 격리돼 내가 작업하는 과정을 다 봤어요. 주인공이 남극 바다로 뛰어들게 되는 상황인 85회, 86회, 87회 3회차를 한 회의 고료만 받고 한꺼번에 공개해달라고 했어요. 2021년에 해가 가기 전에 이것까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12월31일에 공개하기 위해 무리해서 원고를 만들었는데, 아들이 아빠가 원고 작업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다 본 거지요.(그림6)
아내는 <어린>을 하면서 나의 내면을 청소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어요. 제 생각, 고민, 딜레마 같은 것이 <어린>에 다 들어가 있어 총체적으로 봤을 때 <어린>을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미생>이 인기를 얻은 것은 제가 나이 들어서였어요. 그전에는 슬럼프도 있었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방법을 찾고 일을 구하게 되잖아요. 글빚, 말빚, 모든 종류의 빚을 지게 되지요. 그 모든 것이 내가 가장 상황이 좋을 때 고스란히 요구받게 됩니다. <미생> 연재가 코앞에 있어도 그동안 말해놨던 원고들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미생>을 하면서 여러 작품을 동시에 하게 된 겁니다. 모두 내가 원했던 작품이지만 상황이 꼬이면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지요. 작품 외적으로도 많은 일이 있었지요. 회사를 하기도 했고,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고, 세종대에서 강의도 했어요. 몸도 지치고 마음도 많이 폐허가 됐지요. 그래서 <어린>을 할 때 폐허가 된 마음속 쓰레기를 촘촘한 갈고리로 다 긁어낸 느낌이 들었어요. <미생>을 끝내자마자 다음 작업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어린>을 하면서 깨끗하게 씻겨낸 뒤 만들어진 에너지가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
백정숙 만화평론가
윤태호 작가가 남극을 다녀온 뒤 만나서 신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후 <어린>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워낙 <미생>이 뜨거웠던 때라 나중에 완결되면 보려고 미뤄뒀다. 인터뷰하기 전날 윤태호 작가의 여러 작품 가운데 안 본 것이 있나? 작품 목록을 보면서야 <어린>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밤새워 보고, 지하철 타고 가면서 보다가 수내역에 들어서면서 마지막 장면을 봤다. 그가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가볍게 <어린>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게 사달이었다. 이때부터 작품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 게다가 <어린>은 그에게 각별한 작품이었다고 하지 않나. 원래는 인터뷰를 간단히 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수다 떨며 놀자고 했다. 하지만 작품 이야기는 5시간이 넘게 쉼 없이 이어졌다. 나도 덩달아 작품 속에 빠져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계속 물었다. 중간에 잠시 그는 “누나, 그런데 이렇게 많이 해도 되나?” “응, 내가 알아서 할게” 정도의 대화는 한 번 있었다. 이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많은 내용을 말했는지 몰랐다. 그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 까먹었다. 지면에 실린 내용은 반의반 정도만 담았다. 양의 문제보다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것을 다 보여주지 못해 아쉬워서 한마디 남긴다.
<혼자 자는 남편> 1995년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 연재. 성인 남성들의 성적 상상력을 다룬 작품.
<연씨별곡> 1996년 <미스터 블루> 연재. <흥부전>을 패러디해 놀부와 흥부의 선악을 바꿔 인간의 뒤틀린 면을 보여주는 풍자개그 만화.
<발칙한 인생> 1998년 <미스터 블루> 연재. 본격 지역사회 성인야구 만화. 오장리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30대 백수 박태화와 이발소, 서점, 세탁소, 지역 유지 등이 참여해 만든 야구단 이야기.
<야후> 1998년 만화잡지 < 부킹> 연재. 건물 붕괴 사고로(삼풍백화점 붕괴를 떠올리게 하는)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김현이 수도경비기동대에 입대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사고의 현장을 신무학과 함께 종횡무진하는 작품. 에스에프(SF)적 설정도 있어 판타지적인 세계관까지 갖추고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질문과 분노를 표현 <水上한 아이들> 1999년 만화잡지 <히트> 연재. 수구부 이야기. 매점 누나를 감독 삼아 운동장에서 수구를 하고 양재천에서 연습하며, 비인기 종목인 수구에 매달리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만화.
<이끼> 2008년 만끽→미디어다음 연재.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류해국이 의절한 아버지 류목형의 부고 소식을 듣고 류목형이 지냈던 시골 마을에 등장하며 벌어지는 스릴러. 마을 이장 천용덕을 중심으로 비밀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마을 이야기.
<내부자들> 2010년 한겨레신문 ‘훅’(hook) 연재. 언론인, 정치인, 재벌, 검·경까지 포함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조리를 파헤친 작품.
<미생 시즌1> 2010년 미디어다음 연재. 바둑 프로 입단에 실패한 고졸 장그래가 대기업 원인터내셔널 종합상사 영업팀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해 벌어지는 이야기
<인천상륙작전> 2013년 한겨레신문·네이트 연재.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변화무쌍하던 시기를 다룬 작품.
<파인> 2014~2015년 다음 만화속세상 연재. 1970년대 범죄자들을 모아 신안 앞바다 보물을 도굴하려는 근면성실 악당 이야기.
<미생 시즌2> 2015~2024년 미디어다음 연재. 장그래가 재취업한 온길인터내셔널 중소기업 무역상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리진 시리즈> 2017년 저스툰 연재.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 지식의 본질을 다루는 지식만화 시리즈.
<어린> 2020년 카카오웹툰 연재. 번아웃이 온 작곡가 이이온이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해 벌어지는, 연예기획사와 남극 과학자 간 아이러니한 조화를 다루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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