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소소한 애태움을 그리는 도전…<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수신지 인터뷰

[21WRITERS 수신지②] 만화가로서의 책임과 의무
등록 2024-05-25 09:51 수정 2024-05-31 17:48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수신지 제공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수신지 제공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우리는 계속 말하고 더 멀리 날아갈 거야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0.html) ◆

무심코 지나쳐온 저릿한 고교생들 속내

가족제도 내 여성의 인권을 고민하게 했던 <며느라기>가 현실을 되묻는 작품이었다면, 1990년대 고등학생의 생활을 그린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밋밋한 일상에 색채를 더해주는 귀엽고 명랑한 작품이다. 같은 작가에게서 나온 작품인 만큼 아주 다른 주제와 정서 속에서도 공통점은 존재한다. 두 작품 모두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건이 특별히 돌출된 부분 없이 평범하고, 진폭이 적은 만큼 들여다보는 시선이 섬세해 미묘한 순간의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그런 섬세함이 <며느라기>에서는 무심코 지나쳐온 며느리들의 괴로움을 살피는 데 발휘됐다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서는 비교와 질투로 남몰래 저릿해지는 고교생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데 쓰였다. 물론 성적으로 1등만을 특별 대우하는 등 부당하고 갑갑한 상황이 지워져 있는 건 아니지만, 밝고 산뜻한 표지만 봐도 이전 작품보다 유난히 말랑말랑 사랑스러운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떤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한 걸까.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3권 표지.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3권 표지.


“학교 다니고 숙제도 하고 시험 기간이면 공부하”며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는 ‘평범한’ 학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던 작가에게 어린 시절 본 만화는 재미있지만 공감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범생이라 해도 어떤 큰일에 휩싸이거나 불량한 남자친구가 생긴다든가” 해서 결국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학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시작됐다.

사실 이 작품은 2011년 공모전에서 단편으로 수상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모범생으로 어른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반장 ‘아랑’이 학생들만 있는 자습 시간에 선생님이 시킨 대로 떠든 아이의 이름을 적으며 맘 졸이는 시간을 그렸다. 아랑은 고자질쟁이가 되는 죄책감, 떠드는 친구들에 대한 짜증과 서운함, 자기 공부를 못하는 억울함 등 한 가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어렵게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내려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 이 단편의 핵심인데, 반으로 돌아온 선생님은 아랑에게 언제 그런 일을 시켰냐는 듯 적은 이름들을 보지도 않고 넘겨버린다. 이 허무한 결말을 핵심이라 본 것은 특별한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야말로 아랑이 겪은 맘고생이 조명될 수 있어서다. 겉으로 드러나는 거창한 사건 없이도 주인공의 속은 타들어가며 누군가에겐 그런 애태움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 소소한 진실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보여주는 공감과 위로의 주춧돌이다.

누구도 나쁘게만은 안 봤으면 좋겠는 마음

화려하고 소란한 사건의 주인공에겐 재미없을지도 모를 이 사소한 순간들을 그리는 일을, 그렇지만 수신지 작가는 즐기는 중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심심한 일들을 재미있는 만화로 그려내는 일이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진다. 오랜 추억과 새 상상력이 함께 자극 받는 것도 반갑다. 10년쯤 연재할 생각으로 1년에 한 권이라는 느린 템포로 기획했던 시리즈를 반년에 한 권씩 출간해온 것은 “막상 하다보니 너무 재밌어서”다.

그래서일까.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그리는 수신지 작가는 자기 작품 속 인물들과 유독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자신이 만든 가상 인물과 사이가 좋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만화가들의 후기를 읽다보면 인물들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를 알게 된다. 편애 없이 모든 인물을 아끼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선인과 악인을 갈라 좋아할 만한 인물을 좋아하는 작가도 있다. 그 어떤 인물도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의외로 마지막 사례가 가장 드물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세 주인공. 수신지 제공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세 주인공. 수신지 제공


수신지 작가 역시 자신의 인물에게 마음을 쓰는 쪽이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읽으면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대번 느껴져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던 것은 모난 곳이 없지 않은데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이 귀여운 인물들과, 대체로 괜찮은 사람인데 결국은 열받게 하는 <며느라기>의 인물들을 같은 마음으로 그렸는지 여부였다. “<며느라기>에서 시아버지나 사위, 그런 분들을 더 밉게 그리기 위해 막 어떻게 한 건 아니에요. 되게 현실적으로 그렸는데 단지 실드를 안 쳐줬죠. (그런데) 도구가 된 것도 사실 좀 생각해보면 미안하네요.”

특별히 마음 가는 인물도 있었다. “<반장>에서 연두를 저는 ‘얘가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리긴 했거든요. 그러니까 ‘좀 얄미운 행동을 해도 이해받고 사랑받고 그런 캐릭터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린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연두’는 반에서 2등을 하면서 미팅도 나가는 ‘잘 노는 우등생’이다. 하지만 쿨해 보이는 모습 뒤에서 사실은 노력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몹시 애쓴다. 가장 친한 친구인 아랑을 좋아하면서도 늘 뒤처지는 탓에 비교와 질투로 저릿저릿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공부할 시간에 드라마를 본 척하기 위해 동생에게 줄거리 설명을 부탁하고 잘 노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미팅까지 나가며, 되고 싶은 자신으로 있기 위해 늘 팽팽한 상태로 머무는 아이.

“의외로 연두가 자기 같단 사람을 많이 봤어요. 저는 ‘너무 미워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이 많았는데.” 작가의 걱정이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그려진 연두를 과연 누가 미워할 수 있을까 싶어 내심 웃었다. 아랑에게 과한 부담을 떠넘기는 선생님을 그릴 때도 “그래도 선생님을 그렇게 나쁘게만은 안 봤으면 좋겠는 마음”에 “귀엽게 그리려고” 신경 썼다고 한다. 인물을 향한 다정함이 이번 작품에는 아끼지 않고 묻어나는 중인 듯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귀엽게 그려진 담임선생님. 수신지 제공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귀엽게 그려진 담임선생님. 수신지 제공


리얼리티 예능을 챙겨봅니다 

수신지 작가의 담백한 그림체와 인물들의 조곤조곤한 성격을 안다면, 그가 <나는 솔로>와 그 스핀오프,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와 <결혼 지옥>까지 전부 챙겨본다는 사실에 놀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렇게 얌전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그토록 정념 넘치는 방송의 열혈 시청자라니. 순두부만 먹을 것 같은 사람이 마라탕을 싱겁다고 말했어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거다.

“저는 용이 나오고 그런 건 안 좋아하거든요. 몰입이 안 되고 계속 현실로 돌아와요. 그런 콘텐츠보다는 그냥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해요. 살아 있는 이야기, 그 안의 사람을 보는 게 좋아요. ‘거기서 더 이상 새로운 캐릭터는 없지 않을까’라고 했을 때도 계속 새로운 캐릭터가 튀어나오는 게 재밌어요.”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들으니 조금씩 간극이 메워졌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 구체적인 사연과 장면이 궁금해진다는 그. 현실의 사람들에 이토록 꼼꼼하게 귀를 기울이니 오로지 실화에만 둘러싸여도 복닥복닥 즐거운가보다. 관심을 갖고 미세한 단위까지 상대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것이 그의 취향이라면, 정념 넘치는 예능을 즐기는 것도 미묘한 감정을 조곤조곤 담아내는 만화를 그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 역시 바로 그 미세 단위의 취향 때문에 그의 만화를 좋아하는 것이니까.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 수신지 제공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 수신지 제공


“아랑이 누나다!” 달려오는 어린이 독자

수신지 작가는 독자들과 밀착도가 높은 작가다. <며느라기>의 댓글이 단행본에 함께 실리기도 했고, 북토크나 북페어를 통한 직접적인 만남도 적지 않다. 그에게 독자는 “아무튼 엄청나게 고맙게 생각하는 존재”다. 독자가 있으니 만화를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솔직하고 실리적인 이유에서다. 당연하지만, 독자와의 관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작품이 지속돼야 하고, 작품이 지속되려면 구매하고 읽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낭만적인 바람도 있다. 그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속 세 명의 주인공이 정말 어딘가에 살고 있는 학생처럼 느껴지길 바란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 만화를 고민하고 있을 때 제주도의 ‘스누피 가든’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스누피나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을, 마치 진짜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걸 들었어요. ‘얘, 이런 애잖아.’ 그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만약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면 이런 장면이 아닐까. 그런데 스누피가 이렇게 사랑받는 건 되게 오랫동안 연재했기 때문이 큰 것 같거든요. 그래서 친구처럼 다가오는 거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캐릭터 갖고 싶다, 그러려면 오래 연재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통해 수신지 작가에게는 어린이 독자들이 생겼다. 북페어에서 “‘아랑이 누나다!’ 외치며 오는 어린이”나 “엄마랑 같이 사서 ‘내가 먼저 읽을 거야’ 말하는 어린이”는 <며느라기>와 <곤> 때는 만날 수 없던 독자층이다. “<며느라기>를 진열해놓으면 찡그리고 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싫다거나 재미없다기보단 ‘저거 뭐 어쩌고 어쩌잖아’ ‘진짜 짜증나’ 이러면서 가는 사람도 꽤 있었거든요.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이 만화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다가오시니 느낌이 아주 다르긴 하더라고요. 되게 따뜻해요.”

자신이 만든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마음을, 창작자가 아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와 인물을 창조해내는 작가의 마음은 알지 못해도, 그런 작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며 자라온 독자의 사정이라면 알고 있다. <해리 포터>나 <토이 스토리>처럼 10년 이상 이어져온 이야기는 독자들의 유년에 뿌리내리고 결국은 삶 전체를 지탱할 만큼 존재감 있는 줄기가 된다. 세상의 풍파를 막아줄 만큼 단단하진 못해도 위로와 즐거움을 내어줄 만큼은 다정하고 너그러운 줄기여서, 이야기 속 인물에도 그 인물을 소개해준 작가에게도 한 번씩 사무치게 고마워진다.

어쩌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속 인물들이 수신지 작가가 새로 사귄 독자들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만화 속 세상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어린이 독자들이 다 자랄 때까지 오래 연재해, 언젠가 수신지 작가와 그의 인물들에게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 따뜻하고 멋질 게 틀림없을 장면을 마음에 그리며, 즐거웠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에필로그

많은 이야기가 오간 90분의 인터뷰는, 내내 만화가 수신지의 행복을 엿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저의 시간”이라고 말한 그는 그 시간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쓸 때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지 조금은 부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아는 듯했다.

인터뷰의 맨 처음 ‘<며느라기> 이후의 변화’를 물었을 때 사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작가로서 삶의 변화였다. 그는 작가로 알려지고 책 판매량이 늘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소진되는 대신 하고 싶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딱 세팅된 걸 스스로 느꼈을 때 진짜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늘 내가 꿈꿨던 모습이기 때문에.” ‘진짜 행복하다’고 말하며 작가는 활짝 웃었고, 웃음 끝에는 작은 감탄이 걸려 있었다.

독자와 더 친해지고 싶다고 바람을 말할 때도 작가의 얼굴은 빛이 나듯 해사했다. 그토록 분명한 행복 속에서 작업하는 작품이 <반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만화 속 인물들의 표정이 한결 더 즐겁고 편안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행복한 얼굴들을 계속 보고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4권을 기다리기로 했다.

작품 목록

<3그램> 2010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창작만화 지원작으로 선정되며 독립출판 형태로 소량 제작. 스물일곱의 암 투병기를 그려낸 자전 만화. 일러스트를 그리던 작가가 만화를 그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스트리트 페인터> 2015년 올레마켓에서 6개월 동안 연재. 미메시스에서 단행본 제작. 미대 졸업반인 아랑이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만화. 이 작품 역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며느라기> 2017년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연재. 2020년 11월 카카오페이지에 개정판 동시 업로드. 2017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 만화가 협회장상, 2018년 올해의 성평등문화상 수상. 평범한 ‘며느리’ 민사린이 가족 안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차별과 폭력을 그린 만화. 평범하게 단란한 가족이기에 보편적이고, 보편적이기에 더 설득력 있다. SNS를 통한 파격적인 연재 형식으로 더욱 화제가 된 작가의 대표작이다.

<노땡큐> 2018년 귤프레스 단행본 제작. <며느라기>의 작업 과정과 단행본 출간 이후 연재된 명절 특별편이 담긴 코멘터리 북. 가족과의 인터뷰와 비평문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곤> 2019년 귤프레스 단행본 제작. ‘낙태’한 여성을 소급까지 해 적극 처벌하는 가상의 사회를 그린 만화. <며느라기>에서 미처 못 다룬 출산과 육아 문제를 다룬데다, 아주 비슷한 온도의 분노로 독자를 들끓게 한다는 점에서도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2011년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같은 제목의 단편 만화를 확장한 만화. 특별한 일탈보다는 모범적인 생활이 익숙한, 평범한 고등학생들을 그렸다. 곧 4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