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나 홍인혜 작가의 인터뷰는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덕질 불패라는데, 사랑이 변하니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6.html
전세 사기 역전극만 해도 충분히 멋진데, <역전>에서는 그야말로 명언을 쏟아냈다. “오늘을 상실하지 말자” “직면한 고통을 기록하자” “(직장인의) 일상은 자비가 없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소진됐다’고 생각한 순간, 각성이라도 한 양 두 눈을 돌게 하는 에너지가 당신에게도 숨어 있다. 판을 뒤집고 사태를 끝장내버릴 광기와도 같은 저력이.”
<역전>이나 시집은 둘 다 “일종의 공포물”이라는 독자평을 받았다. 시인으로서 그의 데뷔작은 ‘두두’였다. 머리가 둘 달린 어느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이 많은 다리로 어떻게 걷고 있지, 생각한 순간 한 걸음도 걷지 못하게 된 지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나는 내 다리 숫자를 세어보다 내 머리가 두 개인 걸 알았습니다 (…) 이 많은 손가락으로 어떻게 쓰고 있지, 생각한 순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된 시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내 손가락은 몇 개인지 세어보았지요 나의 두 머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두두’ 가운데)
그의 머리는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도 같다. 그 많은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일을 간추리는 것이 그에겐 결국 언어였다.
“실제로 저는 만화도 이렇게 오래 그렸지만 제가 ‘찐’으로 하는 일은 언어를 다루는 게 아닌가, 물론 만화도 너무 사랑하지만, 제가 만화가로서 막 제 성에 찰 만큼 재능이 있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언어에 더 기대게 되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제일 쉽고 효율적으로 잘 전달할 툴이 만화일 수 있는 거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쓸 수 있는 것, 툴이 많다는 것, 축복이라 생각해요.”
텍스트를 다루는 여성 창작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2010년대 중후반 디지털 페미니즘 물결에 홍 작가 역시 영향을 받았다. “그 시대의 세계관은 그거를 다 은유하고 있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작품 주제를 페미니즘에서 찾는 동료도 있고,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게 주목적이 아니더라도 그 기준에서 창작물을 돌아보는 것이 요즘 여성창작자들의 기본값”이라고 했다. 페미니즘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생각되지만 그 유속만큼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짧은 시간 엄청난 변화가 쏟아지다보니 같은 이슈에서도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제각기 너무 다른 거예요. 이를테면 ‘비혼’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당연히 개인 선택이지, 그게 이슈거리나 돼?’ 하겠지만, 누군가는 ‘도대체 결혼을 왜 안 해?’ 하잖아요. 이 폭이 1에서 10까지가 아니라 1에서 1000까지 있는 기분이에요. 제가 창작자로서 내는 목소리도 누군가에겐 불편할 정도로 급진적이지만, 누군가에겐 답답할 정도로 구시대적일 수 있지 싶어요.”
여성 창작자들이 ‘나’를 대중에 노출하는 것 또한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기안84, 이말년 같은 남성 웹툰 작가들이 텔레비전이나 유튜브에서 적극 모습을 드러내고 방송사 연예대상까지 받으며 성장하는 것과 비교된다.
“제가 창작을 막 시작하고 얼마 뒤 소위 ‘된장녀 열풍’이 불었어요. 당시엔 쇼핑한 이야기, 뉴욕 여행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만 해도 ‘너도 별수 없는 된장녀’라고 댓글이 달렸습니다. 어쩌다 실물 사진이 공개되면 당연하다는 듯 외모 품평이 달렸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제는 ‘된장녀’라는 말 자체가 낡고 추해졌고 외모에 대한 언급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잖아요. 이런 변화에 힘입어 저도 좀더 적극적인 외부활동을 하게 됐고요. 개인적으로 유튜브라는 미디어가 흥한 것에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니 모두 잠옷 바람으로 요리하고, 며칠 안 씻은 얼굴로 여행하더라고요. 나라고 꼭꼭 숨어 겁만 먹고 있을 이유가 있나 싶어서 강연이나 인터뷰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물론 ‘여성 작가’로서 악플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다. “거친 반응을 감당하는 것은 평생의 마음 수련 거리”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높이 사주고 응원해준 사람들의 애정을 외면할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동료들도 적지 않다. 수신지, 들개이빨, 천계영 등 홀로 일하는 여성 프리랜서 동료를 만나 가끔 술잔과 보드게임 패를 돌리는데, 최근엔 노동자로서 처우에 관한 부분에 고민을 많이 나눈다고 했다. 지면 제의나 고료, 저작권의 조건 같은 이야기는 혼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라 일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격변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또렷한 ‘내 생각’을 갖고 싶다고, 어떡하면 10년 뒤 돌아봐도 후회하지 않을 말들만 남길 수 있을까 고민스럽다고 했다.
“제가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사실을 말하자면 걱정이 많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미이기 때문에 ‘특정 이슈에 대한 발언’에 늘 조심스러워요. 특히나 어떤 시점엔 한 의견이 대세지만 5년 뒤엔 그게 후진 생각이었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아서요. 그래서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목표인데요. 이렇게 말을 고르다보면 또 자신의 비겁함이 후회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5년 뒤나 10년 뒤 돌아봐도 후회하지 않을 줏대 있는 생각을 갖고, 그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일평생의 과제입니다. 창작자로서 어느 선까지는 센스나 재치로 먹고살 수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세계관이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걸 느끼거든요.”
바야흐로 지금이야말로 홍 작가의 세계에서 격변기라고 할까. 2022년, 사연 많던 집을 떠나 본가로 들어갔던 홍 작가는 마침내 새집을 구했다.
“드디어 지난주 토요일에 계약했습니다. 진짜 완전 따끈따끈한 소식! 저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서 파워포인트 한 100장을 이미 2년째 만들어놓고 있었어요. 심지어 마루도 골랐어요.”
3년 동안 퇴사를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1년간 준비했을 만큼 충동이나 즉흥적 결정을 하는 타입이 아니라 “돌다리도 두드려보다 허물어버릴 사람”인데 최근 몇 년 동안 겪은 일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엄청난 고민과 쫄았던 순간”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자력으로 구제했고 그래서 후회가 별로 없다. 광고 일도 올해로 꼭 20년을 맞았다.
“광고업을 20년 하고 나니까 어느 정도는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고 그래서 이제 좀더 주도적으로 브랜드를 만들고 뿌리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창업하는 과감한 선택은 못할 것 같지만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뭔가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미약한 꿈이 생겼고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창작을 잘해내고 싶다, 지금 사실은 출판사에서 샘플 원고를 한두 개라도 달라고 하는 상황인데 그걸 못 써서 석 달째 징징거리고 있고…. (웃음) 만화가로서는 제가 ‘전세역전’으로 동일 토픽으로서 사람들을 즐겁게 쭉 끌어가는 만화의 맛을 느낀 거잖아요. 그리고 요즘 저의 화두가 집을 사고 인테리어 하는 거니까 그거에 대해 소재를 막 적어놓고 있어요. 인테리어도 막상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것인가, 반셀프로 한다면 얼마나 에피소드가 터질 것이여, 그 생각도 좀 해봤어요.”
2016년 여름, 홍인혜는 ‘나와 반려한 나를 양육하며, 나를 살아내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2024년 여름, 그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새삼스러운 삶을 다시 계획하고 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스물한 분의 만화가 안에 들어갈 수 있다니 너무 기뻤어요. 대한민국에 만화 그리시는 분이 얼마나 많은데 21명이라니. 내가 이런 분들이랑 나란히 실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해요.”
기쁘게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이내 광고 파는 사람과 잡지 파는 사람은 함께 한숨지었다. 그래도 홍인혜 작가는 홈페이지·블로그·인스타그램·포털·유튜브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신문·잡지·방송 광고를 모두 해본 프로페셔널 아닌가. “매체의 변화가 너무 빨라서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그의 얘기를 들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언제 무슨 일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하냐고 묻는 말에 작가는 “편안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진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창작자로서 “찰나의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마음에 차는 걸 발표하고 반응도 나쁘지 않고 다음 할 일도 준비돼 있는데 세이브 원고도 있을 때”라고 했다. 홍 작가는 인내심이 있고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의 첫 광고 사부는 “일단 기합이 들어가 팬이 달궈지면 한꺼번에 몇 가지 일도 해낼 수 있다”는 ‘프라이팬 이론’을 들려줬다. 후배들을 더 부려먹으려는 수단이었겠지만, 어느새 홍 작가는 잘 달궈진 프라이팬이 된 것만 같다.
싸늘하게 식었을 때 작가는 ‘굴’을 파고 들어갈 때가 많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굴은 창작의 원동력일지니, 독자에겐 새로운 ‘루나’를 즐길 기회…. 아, 이건 너무 사디즘적 세계관인가.
근황은 인스타로, 실물은 유튜브로
‘루나’는 작가 홍인혜의 분신이다. 2006년, 24살의 루나는 ‘아이라인도 못 그리고 어른 글씨도 못 쓰고 커피는 쓰기만 한데 대리가 되어버린’ 풋풋한 샐러리걸이었다. 이제는 자기 앞가림 확실한 베테랑 프리랜서! 평소 자신에게 엄격한 루나는 술을 좀 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진다. 조주기능사 자격증까지 따버린 루나는 웬만한 칵테일은 쌉가능! 엘지 트윈스 팬이라 종종 순애보를 간직한 같은 팬과 조우하면서 동지애를 느낀다.
독자들은 1980년대 전후 태생의 여성이 많은 편인데 생활툰, 일상툰이기 때문.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lunapunch)에 접속하는 것을 가장 추천. 한번씩 올라오는 홍인혜 작가의 강연이나 독서모임 등 이벤트 소식을 접하기에도 좋다. 작품은 거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책으로 읽어도 편하다. 2023년부터 운영하는 유튜브 ‘루나파크’(@lunapark0130)에서는 운전면허 도전기, 타이 여행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만화 속 루나보다 더 똑똑하고 강단 있으면서도 가끔 허를 찌르는 작가의 ‘허당기’도 보여주는데 은근 매력적. 새로운 동영상을 빨리 업로드하라, 작가여.
<루나 파크> 2006~2007년 루나 파크 누리집 연재. 첫 작품. 열정과 게으름 사이, 명랑과 우울 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20대 여성 직장인 루나의 생활을 다룬다.
<루나 파크: 사춘기 직장인> 2007~2008년 홈페이지 연재. 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광고 카피라이터 루나의 직장생활과 일상. 직장인의 성장담, 루나의 음식과 여행 이야기 등. <루나 파크>와 <루나 파크: 사춘기 직장인>은 단행본(애니북스)으로 출간됐으나 2024년 현재 절판된 상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2011년 단행본 출간, 2018년 개정판 발간. 영국으로 떠나 8개월간 체류한 기록. 환상 없고 절제된 감성, 가끔 터지는 환희의 폭죽!
<혼자일 것 행복할 것>(2016, 달). 1인가구 세대주로서 루나의 기록. 독립생활의 다디달고 쓰디쓴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2021, 미디어창비) 출간 직후 재쇄를 기록한 카피라이터, 만화가, 시인 홍인혜의 언어 에세이.
<우리의 노래는 이미>(2022, 아침달) <문학사상>(2018)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낸 첫 시집.
<루나의 전세역전> 2021년 인스타그램 연재. 2023년 단행본(세미콜론) 출간. ‘전세 사기 100% 충격 실화’라는 부제 그대로. 전세 사기와 역전극. 누가 뭐래도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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