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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가 지긋지긋하다고? 따뜻한 ‘한 방’을 보여줄게…작가 엄유진 인터뷰

엄유진① 화려한 인스타그램에서 사각거리는 연필의 맛
등록 2024-05-25 00:52 수정 2024-05-27 23:14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펀자이씨툰>의 한 장면. 철학자 아버지와 소설가 어머니간 대화에서 배꼽을 잡으면서도 알싸한 깨달음을 얻는다. 엄유진 제공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펀자이씨툰>의 한 장면. 철학자 아버지와 소설가 어머니간 대화에서 배꼽을 잡으면서도 알싸한 깨달음을 얻는다. 엄유진 제공


엄유진 작가와의 인연의 끈은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통해 처음 이어졌다. 엄유진 작가의 아버지, 철학자 엄정식 선생이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을 하실 때, 이사회의 말석에 앉아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를 떠나서도 늘 부족한 것이 많아 배워야 하는 처지이긴 했지만 가끔 만나는 선생이 던지는 철학적 우화들에서 알싸한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무릎을 쳤다.

철학자 아버지, 만화가 딸

하루는, 선생이 이사회에 늦게 오셨다. 이유를 들으니 기다림은 가시고 마음은 따뜻해졌다. 학교의 장학금을 결정하는 회의가 길어졌다고 했다. 대학이 유학 가는 학생의 모든 비용을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교수가 될 요원을 확보하는 장학금이었다. 심사 대상이 된 학생이 불치병을 앓아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그가 학업을 마칠 수 있을지, 그리고 장기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서 교수 요원이 될지 분명치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력하는 학생을 응원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장학금의 목적이 장기적인 교수 요원 확보인데 이 학생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우리가 확률을 이유로 비상한 노력으로 장학금을 받을 자격을 갖춘 후보자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오셨다.

어머니께 상실한 기억을 채워 드리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좋을지 여쭤보는 웹툰 장면. 엄유진 제공

어머니께 상실한 기억을 채워 드리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좋을지 여쭤보는 웹툰 장면. 엄유진 제공


고민의 과정과 결론으로 끌고 가는 빼어난 생각의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철학으로 단련된 사유로 일상의 문제를 풀어가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늘 많은 것을 배우는 엄정식 선생이 따님의 만화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엄유진 작가는 아빠를 이렇게 그린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먹고 싶은 마음과 먹으면 안 된다는 당위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며 고민하는 사람. 그렇게 고민하는 게 직업인 철학자. 그런데 우물쭈물하다 어정쩡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민의 결과로 결론을 낸다.

언뜻 보면, 그 고민의 과정은 만화에 있는 에피소드들처럼 웃음을 자아낸다. 선생은 생일날이 되면 너무 기뻐하지만, 시시각각 줄어드는 생일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고, 자정이 지나면 그때부터 다시 1년 동안 자기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기청정기를 사러 가서 깎아주지 않는 점원에게 직접 배송할 테니 청정기는 공짜로 달라고 이야기하는 스케일이 큰 양반이다. 흥정에 실패하고 돌아 나오면서 공짜로 주려는데 딸과 사위가 웃어서 망했다고 타박한다. 선생은 나이, 노화, 죽음, 돌봄, 그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세대와 시대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 유머를 실어 이야기해준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사각거리는 그림 위에 올린 엄유진 작가의 만화를 단숨에 다 읽었다.

‘그림 기술’보다 중요한 것

인스타그램에서는 일찌감치 스타였으나 단 두 권의 책, <어디로 가세요 펀자이씨?>와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엄유진 작가를 서울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만났다. 엄정식 선생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책과 인스타그램의 작품들을 만났지만 작품을 읽으면서 빠져들어 팬이 됐다. 팬심으로 두근거리면서 작가를 만났다. 엄유진의 만화는 이전에 종이책으로 묶여 나오던 만화와도 다르고 우리나라에서 요즘 큰 인기를 끄는 웹툰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분류하자면 몇 개의 장면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구성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인스타툰에 해당한다.

엄유진 작가. 류우종 기자

엄유진 작가. 류우종 기자


네 컷 만화로 유명한 정세원 작가나 독자들의 청을 받아 그려주는 키크니 작가 등을 이 그룹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로 꼽을 수 있다. 매체의 특성상 그림은 압축적이고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거기에 더해 정세원 작가처럼 픽셀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린다든지 키크니 작가처럼 굵은 선으로 힘 있게 글을 써서 넣는다든지하는 눈에 띄는 그림체를 가지고 있다. 한 컷으로 눈을 끌고 몇 장의 그림 안에 이야기를 완성해야 하니, 한 방이 중요하다. 눈을 찌르는 화려함이 이어지는 인스타그램에서 연필로 그린 사각거리고 부드러운 엄유진 작가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 그림의 시작이 궁금했다.

인스타그램 화면에서 만나는 엄유진 작가의 사각거리는 그림들은 다정하고 따뜻하다. 엄유진 제공

인스타그램 화면에서 만나는 엄유진 작가의 사각거리는 그림들은 다정하고 따뜻하다. 엄유진 제공


“처음부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미술학과 세부 전공이 충분히 나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디자인과를 선택해서 갔던 것 같아요.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상대적으로 내려다보는 풍토가 있어서 용기를 내기가 어렵기도 했어요.”

그는 런던에 있는 킹스턴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고민만 하다 영국으로 갔는데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입시 학원에서 그림에 대한 혹독한 기술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영국 학교의 석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만난 친구들의 그림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기초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과 일 년 뒤, 그들의 발전하는 속도와 자기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역량을 제가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부러웠어요. 한국에서 입시미술학원을 다니며 정해진 시간에 완벽하게 그려내어 평가받고 점수 매겨지는 것에 익숙했던 저는 주어진 틀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자유’를 느꼈고 배웠습니다.”

주일우 만화애호가 

◆ <펀자이씨툰> 엄유진 작가의 인터뷰가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사람 사이’를 사각사각 들추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55.html

작품 목록

<어디로 가세요 펀자이씨?> 인스타툰. 2022년 문학동네서 출판. 작가의 일기장이 푸슬푸슬, 사각사각, 연필선이 유진과 파콘 그리고 짠이의 생활을 따라가며 웃음을 준다.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 인스타툰. 2022년 문학동네서 출판. 한국에 정착한 파콘의 본격적인 한국 생활. 천 리 타향에서 만난 새로운 가족들과 느끼는 단짠 생활은 진한 감동을 남긴다.

<행복한 철학자> 2023년 11월 발행. 작가의 만화로 독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소설가 어머니가 철학자 아버지에 대해 쓴 글에 작가가 새로이 만화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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