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방> 최성민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현실과 환상은 본래 한 몸이었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61.html
환상과 현실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발상에 더해, 작가님의 그림체도 현실적인 순간을 더욱 이질적으로 느끼게 해주지 않나 싶어요. 어떤 순간에는 ‘팝아트’가 연상될 정도로, 일정한 굵기의 선에 망점이 두드러지는 듯한 색감과 질감의 표현이 현실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선에 대한 이야기는 ‘꿈보다 해몽’에 좀더 가까운 것이긴 하네요. 저는 어떤 순간에는 다채로운 두께로 선을 사용하고 싶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선을 다양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그렇게 다양한 질감과 굵기의 선으로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일정한 굵기의 선을 사용했을 때 그래도 완성이 잘된다고 생각해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제가 그리는 일정한 선이 제가 그리는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게 된 것 같아요. 저는 복잡한 인간관계나 심리에 흥미가 가는 편이에요. 양가감정 같이 모순적인 심리 말이죠. 복잡함을 재미있게 읽히도록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데, 그게 잘 됐을 때 단순하면서도 음미할 만한 깊이가 생겨요. 심플하게 보이는 복잡함, 저는 그걸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제 작품의 깔끔하고 균일한 선이 이미지적으로 제가 보여주고 싶은 바를 잘 드러내게 된 것 같아요.”
<좁은 방> 연재, 과거를 마무리 짓고 나아간 계기그런 의미에서 <좁은 방>은 작가님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자 시도였을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 작품에서 종종 드러났던 SF나 환상적인 요소도 많이 줄었고, 또 처음 작업하는 주간 연재 웹툰이었으니까요.
“사실 <좁은 방>은 원래 <쾅>에서 처음 연재했던 장편 작업이었어요. 완결까지 다 그리지는 못했고, 처음 생각하던 전개의 3분의 2 정도까지밖에 못 그렸죠. 그러다가 당시 카카오웹툰에서 운영하는 독립만화 레이블 ‘즐겨찾기’ 대표로 활동하던 <엄마들>의 마영신 작가에게 연재 제안을 받았죠. <쾅>에서 잘 봤는데, 이제 그걸 완결까지 그려보는 것이 어떠냐면서요. 마무리를 못 지은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계속 페이지로 넘기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만화에 익숙한데, 웹툰의 스크롤뷰가 저에게는 너무 익숙지 않았어요. 주간 연재도 처음이어서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나마 연재 기간이 4개월로 짧아서 다행이었죠. 모든 컷에 색을 입히는 풀컬러 작업도 처음이었고요. 웹툰은 웬만해선 댓글이 매 화 붙으니까 연재하는 내내 수많은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도 처음이었죠.
작품적인 차원에서도 저에게는 많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어요. 처음 만화를 그리던 시절에 그렸던 작품을 만화 작업을 그래도 좀 하고 나서 다시 접하는 것인데, 웹툰을 처음 그리면서 제 시작점을 다시 대하는 것이니까요. 분명 내가 만든 작품인데 지금의 나와는 약간 다른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의 나는 왜 이렇게 연출했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대사를 쓴 거야? 과거의 나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처음 만화를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제가 추구하는 만화의 스타일도 많이 달라졌고요. 잠시 멈춰서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하다가도, 과거를 마무리 짓고 다시 가던 길을 힘차게 나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만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간 만화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전과 달라진 점을 느낀 게 있을까요.
“생활적인 차원에서는 점차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은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면서 생계를 해결했던 적이 있었고, 만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일러스트 작업을 병행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 길을 걸어가자고 다짐하고, 의식적으로 만화 창작에 시간을 더 많이 쓰니 삶이 좀 단순해지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만화가로서의 수입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죠. 만화가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처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서는 결국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니까요.
내적인 차원에서는 저를 표현하는 방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말이나 글로 저를 표현하는 게 늘 힘들어요. 다른 사람에게 제 내면세계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어렸을 때부터 늘 생각했고요. 만화를 본격적으로 하고 나면서는 그런 부분이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어요. 제가 느끼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말로 하기는 쉽지 않아도, 만화로는 설명할 수 있구나. 내 감정을 내가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로 된 대사뿐만 아니라 칸과 그림이 모두 필요하구나, 그런 점을 많이 느꼈죠. 표현하기까지 시간은 걸릴 수밖에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만화로 공들여서 드러내면서 치유되는 느낌도 많이 들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게 되기도 했고요. 만화를 그리면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만화를 어떻게 그려나갈지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구상하는 작품은 SF 장르예요. SF적인 배경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러 이유로 조금씩 어긋난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작품을 오랫동안 꾸준히 그리기 위해 기본적인 체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어요. 아직은 10시간 넘게 앉아서 만화를 그리는데도 위장도 튼튼하고 디스크도 없지만, 조금씩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최소한 수면의 질이라도 높여야 번아웃 같은 컨디션의 기복이 덜한 것 같아요. 작품적으로는 하나의 호명에 갇히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엄청나게 특이하거나 실험적이거나 예술적인 만화를 지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대중적인 만화를 그리지는 않거든요. 그때마다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거죠. 쉽게 분류할 수 없는 경계에서, 어느 한 분류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면서 건강하게 계속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최성민 작가의 작품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쉽게 재단할 수 없다. 그와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경향성의 작가로 딱 고정되기보다는, ‘최성민이 그리는 작품’으로서 이야기되길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환상적인 요소가 있기에, 현실을 표현함에 있어서 SF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그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이 복잡한 현실을 때로는 단순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에서는, 만화를 그리는 방법론 이상으로 최성민 작가가 복잡한 세상을 명쾌한 감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느꼈던 시각의 깊이는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리라.
최성민 작가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오래 그릴 수 있길, 그리고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바를 그때마다 만화를 통해서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작가의 다양한 시도를 최대한 받아줄 수 있는 표현의 장 역시 필요하다. 작가가 쉽게 지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여유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최성민 작가가 지닌 삶과 작업에 대한 자세를 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최성민 작가와 같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며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만화가들이 꾸준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꼭 그럴 수 있길 바란다.
성상민 문화평론가
<출동! 샤바라> 2016~2018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연재. 아쉽게 단행본이 나오지 못한 작품.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여성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아동 만화.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 2020년 만화세계 펴냄. 최성민 작가의 첫 단행본. 쉽게 분리할 수 없는 현실과 환상을 소재로 한 3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퓨러파잉 F> 2020년 만화세계 펴냄. 두 편의 SF 단편이 수록된 단행본. 비현실을 말하면서도 결코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최성민의 스타일이 빛을 발한다.
<좁은 방> 2021~2022년 카카오웹툰 연재. 2023년 송송책방에서 단행본 출간. 최성민 작가의 첫 번째 웹툰. 배경과 소재는 가장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는 감각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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