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주제를 받고 나도 옛날에 일기를 썼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집 안을 뒤진 결과(‘마감증후군’의 ‘딴짓하기’의 병증으로 쇼핑, 폭식 등의 유형도 있다), 붙박이장 상자 속 여행 필름과 함께 두 권, 스케치북과 공책 무더기에서 세 권, 그리고 책장 상자에서 다섯 권이 나왔다. 책장에도 2004년부터 쓰고는 결코 못 끝내고 있는 일기장이 있다. 두 권은 여행 일기다. 20대 초반 4년간 8권의 일기를 썼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기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발굴됐다.
스테파니 도우릭의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은 일기 쓰는 요령을 알려주고, 팁 등을 제공하는 책이다. “일기 쓰기는 원래 본능적이다.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 행동이 지니는 패턴을 볼 수 있다.” 몰랐던 자신을 찾아가는 게 일기라는 것이다. 일기장에는 마음이 괴로울 때만 일기를 쓴 듯 재밌는 글은 하나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쓴 일기를 열아홉 살 때 공터에서 모아놓고 불태워버린 적이 있다. 그 시절에도 일기는 우울의 결정체였던 것 같다. 일기를 쓰는 사람의 특징을 조앤 디디온은 이렇게 풀어낸다.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노트 쓰기-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퓰리처상 수상 소설가 존 치버의 <존 치버의 일기>도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들어가야 한다. 어느 날의 일기는 “비평들이 나왔지만 내겐 아무 의미도 없다”(1975년)가 다다. “종려주일을 맞아 찾아간 교회에서 한바탕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난 내 눈물이 음탕하다고 생각했다.”(1975년) 자신의 성적 취향이 진저리 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여자를 원하고, 때로는 남자도 원한다. 그런데 피가 날때까지 나를 채찍질하기보다 차라리 나의 육욕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인가?”(1972년) 알코올과도 끊임없이 싸운다. “나는 고독한 술꾼이다. 점심 전에 약간의 진통제를 복용하지만 정말이지 오후 늦게까지도 일할 수가 없다. 4시나 4시 반, 혹은 5시 무렵이 되면 마티니를 마신다.”(1958년) “점심 전에 위스키를 마신 후 페데리코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앞에 연이은 일기) 마지막 소설인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에 분신과 같은 양성애자를 등장시키지만 치버가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일기였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 일기를 발간해달라고 부탁한다.
김연수는 <시절일기>에서 “이 글쓰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 자기 이해다”라고 했다. 카프카도 일기에 썼다. “나는 일기 쓰는 것을 더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나를 확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카프카의 일기>, 1910년 12월16일)
“오후 2시 뻐꾸기가 뻐꾹뻐꾹 하고 울었다. 삼다수길 개천가 작은 돌이 큰 돌에 쏙 들어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만난 P는 요즘 일기를 쓰고 있다. “신기하고 좋았던 일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진 탓이다. 초등학교 때 일기는 검사받는 글이었기에 자신을 고백해본 적이 없으니 이것이 첫경험이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일기 검사가 아동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그것을 개선하도록 의견을 표명한다. 하지만 ‘글짓기 지도’ 방식으로 여전히 일기 검사는 계속된다. 황선미 작가의 동화책 <일기 감추는 날>은 2003년 나왔고 2018년 재발간됐다. 엄마는 부부싸움한 이야기를 지우라 하고 선생님은 일기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기에 남을 흉보거나 헐뜯지 말라고 한다. “훔쳐보는 엄마도 밉고 검사하는 선생님도 밉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면 머리에 담아두는 게 낫겠다. 너무너무 속상할 때는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꽥 소리를 지르는 게 낫겠다.”
글이란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 것이 일기다. 단, ‘검사’의 방식이든 ‘발각’의 방식이든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 ‘읽힐’ 때가 있다. 그러고도 비난받는 건 나. 원래 발표되는 글이라도 처음은 자신만이 읽고 그다음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 ‘일기’란 그런 면에서 걸음을 멈추는 글인데, 그런 일기가 더 걸어갈 수도 있다.
언제나 다른 발표할 게 없을 시점, 가장 마지막에 ‘창작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일기는 인쇄된다. ‘솔직하다’는 건 가끔 작가가 세운 아성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펠리체 바우어 양. 내가 8월13일에 브로트에게 갔을 때, 그녀는 식탁에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하녀처럼 느껴졌다.” 여성의 모습을 혹독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카프카 같지 않지만 이것 또한 쿨한 카프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늘부터 일기를 꼭 쓸 것! 규칙적으로 쓸 것! 포기하지 말 것! 설령 아무 구원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싶다.”(<카프카의 일기>, 1912년 2월25일) 버지니아 울프는 1915년 1월1일부터 1941년 3월28일 자살하기 나흘 전까지 일기를 썼다. 울프는 책을 펴낸 뒤 나오는 서평을 끊임없이 ‘비평’하고 매일 판매부수에 집중하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는 이런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세 번째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쨌든 작가들도 이럴진대 어떤 것을 쓰더라도 두려울 게 없다. 김연수는 말한다. “사전에서는 일기를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고 정의하지만 나는 ‘읽는 사람이 없는 매일의 글쓰기’라고 하고 싶다. 자신 또한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시절일기>)
“길게 쓰려고 하지 않는데, 누우면 그냥 잠들어. 그래서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에버노트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 계속 쓰게 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P는 하루에 두 줄 쓰기도 버겁다고 말했다.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는 여러 가지 일기에 대한 실용적인 지침이 나온다. 그중 “3인칭으로 써보라”는 것이 있다.
“처음 미움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겪었던 일인데, 그 일에 관해 끄적이자 몹시 피곤해서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일어나서 다시 읽어 보니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라는 주어를 ‘황구’로 바꾸어서 다시 작성했다.”(문보영, <일기시대>)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는 이외에 매일 꾸준히 써라, 일기에 날짜를 적어라, 시간도 가끔 적어라, 때와 장소를 둘러싼 정황을 적어라, 친숙한 것과 친숙하지 않은 것을 결합하라, 더욱 직접적으로 써보라, 뼈대에 살을 붙여보라, 대략적으로만 써두었던 것을 골라라, ‘…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살펴보라, 때때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등 실용적 지침이 있다. 저자는 항상 20분은 계속해서 쓸 것을 강조한다.
더 실용적인 팁도 있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김신지는 원래 꾸준히 기록하는 것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5년 일기’를 쓴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한 날짜에 하루 한 줄로 5년 치를 쌓아가는 일기장이다. 김신지는 “○○했던 ○○요일”처럼 1분 시간을 내어 하루를 정리해보자고도 제안한다. 행동 원칙으로 권하는 것은 이렇다. 목표는 가능한 한 작게, 그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으로, 신호와 보상 만들기. 인간은 21일간 계속하면 뇌가 새로운 행동에 익숙해진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실천에는 60일이 걸린다고 한다.
어떤 것을 쓸 것인가. P는 인생에서 처음 겪은 일을 기록한다. <완경 일기>는 저자 다시 스타인키가 열감이 오는 시기를 기록하는 일기에서 시작한다. <몸의 일기>는 한 의사가 자신이 12살 때 당한 모욕적인 사건을 계기로 80살까지 평생 자신의 몸을 관찰해온 기록이다. “내 몸의 일기를 쓰려는 또 다른 이유는, 모두들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란 몸은 전부 다 거울 달린 옷장 속에 버려져 있나보다. (…) 그 짧은 일기에 온갖 잡다한 얘기를 다 쓴다. (…)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몸에 관해선 결코 얘기하는 법이 없다.”(1936년 11월18일 일기) 책은 능청스러운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이다.
페나크처럼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는 ‘내면일기’에 반하는 ‘외면일기’(Journal Extime)를 써왔다. “(나는)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 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다. “나는 너 자신을 알라, 고 한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말이 내게는 항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명령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일기는 내면에만 집중한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통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느끼는 자신의 변화를 메모지에 끊임없이 과학자처럼 기록했다. “깜짝 놀라면서 나는 깨닫는다.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들에 대한 기억이 더는 나를 울게 만들지 않는 순간이 이제 왔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실’을 선택할 수야 없겠지만, 실연이든 연애든 감정의 변화를 기록할 수 있다. 양자윤은 만화 <분노의 임신일기>를 통해 자신이 처음 경험하는 임신을 ‘기쁨’이 아니라 ‘분노’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오늘의 분노지수, 가장 분노했던 일, 분노 해소 방법을 정리한 일기장이 부록으로 주어진다.
동화책 <나, 오늘 일기 뭐 써!>에서는 언제나 쓸 게 없어서 일기를 건너뛰던 준수에게 일기의 요정이 요령을 알려준다. 생활일기, 그림일기, 독서일기, 마인드맵일기, 관찰일기, 메모일기, 동시일기, 영어일기, 주장일기, 여행일기, 요리일기, 한자일기, 단어그림일기, 환경일기, 가족일기, 상상일기, 조사일기, 견학일기, 만화일기, 편지일기. 20가지다. 하루에 한 가지씩 하면 20일이 지나겠다.
문보영은 일기가 “사실을 기록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글쓰기”라고 했다. <일기시대>에는 그림도 있고,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상상도 있고, 친구도 있고, 밤도 있고 새벽도 있다. “황구는 느끼지 못한 것을 벌충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다. 늘 그랬다. 세상이 실망이어서 일기를 썼다. 부족한 느낌을 채우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느끼는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라 덜 느끼는 사람이 쓰는 무엇이었다.”(민음사TV에서 문보영이 읽어준 시)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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