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출판 편집자인 앤드루 릴런드는 2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천천히 시력이 사라지는 병이다. 지금은 완전한 시력을 가진 사람의 6% 정도 되는 시력을 갖고 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 사이에서 그는 ‘모순적인 복시’(Double vision)로 모든 것을 인식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비탄에 빠지기보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걷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는 “눈멂은 급진적일 정도로 독특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게 됐다.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송섬별 옮김, 어크로스 펴냄)는 눈이 멀어가는 한 남성이 경험하는 경계에 선 정체성, 다른 정체성으로 이동하는 여행기다. 저자는 한 여성의 남편이고 아들의 아버지이며 책을 사랑하는 독자 겸 편집자이자 작가, 시력이 사라져도 여전히 특권을 지닌 이성애자 백인 남성으로서 자신의 변화하는 정체성을 궁금해한다. 지적인 궁금증이자 존재론적 고민이었다.
시력을 잃으면 ‘남성 응시’가 사라지는가? 저자는 시력을 잃는다고 해서 이성애자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에 집착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 응시’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남성 응시는 시력이 사라져 좌절되기엔 너무 깊고 끈질긴 것이었다. 코미디언 빌 코스비는 성폭행으로 고소당해 재판받을 당시 법적 실명 상태였지만, 눈이 멀었다고 고발자를 식별하지 못하거나 법적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하지는 않았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지팡이보다 더 도움이 되는가? 미국 최대 시각장애인 단체 ‘전국시각장애인연맹’은 생물학적 욕구와 취약성을 가진 안내견에 의지하는 것은 지팡이를 사용하는 일보다 한계가 크다며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지만,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자립성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저자는 꼼꼼히 장애와 비장애, 장애와 인종, 장애와 성별, 장애와 지역, 장애와 동물 등의 문제를 아울러 눈멂으로 새로 알게 된 세상과 삶의 이야기를 적는다.
‘자미’ ‘불태워라’ 등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 송섬별은 이 책을 작업하면서 기초 점자를 배우고, 저시력자를 위한 시설물과 영상을 체험하다가 의미 없게 느껴진 시도들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대신 레퍼런스로 언급된 ‘거기 눈을 심어라’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등을 읽고 장애학을 공부했다. 이야기가 깊이 있고 뻔하지 않으며 철학적인데 책장까지 술술 넘어가는 건 원문의 힘과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옮긴이의 섬세한 ‘터치’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432쪽, 2만2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나의 작가주의
정성일 지음, 마음산책 펴냄, 2만2천원
35년간 평론가로, 감독으로 활동해온 정성일의 단독 저서. 중국 감독 왕빙의 영화 9편을 중심으로 그의 세계를 탐구한 전무후무한 국내서다. 왕빙은 선양시 공장단지 ‘톄시취’에 관한 9시간11분짜리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로 등장했다. 정성일은 그 뒤 지금까지 왕빙에 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고, 왕빙에 관한 책을 앞으로도 계속 쓰겠다고 한다.
드라마
서한나 지음, 글항아리 펴냄, 1만5천원
잡지 ‘보슈’를 만들고 ‘한겨레’에 칼럼을 썼다. 에세이 ‘사랑의 은어’(2021)를 내놓자마자 서한나는 ‘다음이 기다려진다’는 평을 들었다. 이 책이 그 책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여성들에 관한 깊고 내밀한 이야기. 시간이 쌓이자 이 관계엔 도돌이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부터 다시 만나고 똑같이 어려워한다. 그럼에도 친구가 되는 여성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김창석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만3천원
‘한겨레’ ‘씨네21’ ‘한겨레21’에서 기자로 일한 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언론인을 배출한 김창석의 저널리즘 글쓰기. 기자나 PD가 되려는 이들이 마주할 ‘글쓰기’ 관문에서 알아야 할 점을 밝힌다. 핵심은 세 가지.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논증은 치밀해야 한다, 자기 관점을 담아야 한다. ‘자기 고백’으로 글에 힘을 불어넣는 방법까지.
판타스틱 북월드
강건모 등 지음, 교유서가 펴냄, 1만7천원
교유서가 창립 10주년을 기념한 산문집이다. 책이라는 열쇳말로 작가, 번역가, 비평가, 디자이너, 출판인 등 39명에게 청탁해 받은 원고를 엮었다. ‘외로울 때면 책을 읽었다’(고영직) ‘나는 왜 그토록 책에 매혹되었을까?’(장석주) ‘빌린 책의 흔적들’(이라영) ‘편집자와 번역자’(정영목) 등. 소설집 ‘출간기념 파티’도 함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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