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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 ‘집단 경력단절’ … 밥 짓고, 청소하고,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 105명 조명한 ‘그들도 있었다’ 1, 2
등록 2024-10-19 16:24 수정 2024-10-24 21:41
일본 유학 시절 박래현의 수작인 ‘단장’. 단단하고 말끔한 인물과 정물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수상했다.

일본 유학 시절 박래현의 수작인 ‘단장’. 단단하고 말끔한 인물과 정물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수상했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1948년 8월 여성 미술가 박래현이 ‘결혼과 생활’이란 글에 쓴 내용이다. 1920년 4월 평안남도 농가 지주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조선미전에서 수상하는 등 중견 작가로 자리를 굳히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을 만나 결혼했다. 김기창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 학부를 나온 당신”이라고 표현했지만, 박래현은 남편과 함께해온 ‘부부전’에도 불구하고 ‘김기창의 부인’으로 자주 명명돼야 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예술가와 결혼하면서 일상의 잡무가 늘 쌓여 있었음에도 ‘자매’(1955), ‘이른 아침’(1956), ‘작품 19(수태)’(1967) 등 자신만의 세계를 발전시켜나간 그는, 20세기 한국 화단에서 선구적 자취를 남긴 여성 미술가로 평가받는다.

박래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기부터 1970년대 이전까지 활동한 상당수 여성 작가는 ‘집단 경력단절 시기’를 겪어야 했다. 결혼·출산·육아·내조라는 당대 사회의 구조적 억압이 빚어낸 현실 때문인데, 이런 와중에도 창작을 포기하지 않은 여성 미술가들이 있었다. 윤난지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등 여성 연구자들로 이뤄진 현대미술사 연구 모임 ‘현대미술포럼’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을 필두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여성 미술가 105명을 조명했다.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20인 선집에는 왜 여성이 5명밖에 없는가’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과연 정말 여성에겐 예술적 재능이 부족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도서 기획으로 이어졌다.


책에는 우리 미술의 근대화를 이끈 ‘최초의 여성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195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에 안착한 작가들(이신자, 성옥희, 나희균, 김정숙 등), 한국화란 전통 장르를 어떻게 동시대와 접목할지 고민한 작가들 등 다양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도전적 작품을 통해 사회 이슈를 일으킨 작가들도 보인다. 목차를 따라가다보면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흐름이 드러난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사랑은 노동
모이라 와이글 지음, 김현지 옮김, 아르테 펴냄, 3만8천원

데이팅앱이 급성장하고 연애 예능이 대세인 시대, 미국 하버드대학 비교문학과의 모이라 와이글 교수가 100년 동안 펼쳐져온 ‘데이트의 역사’를 탐구했다. 애초 데이트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도시로 유입하면서 날짜를 정해 낭만적 시간을 보낸 산업혁명기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데이트에 얽힌 경제·사회적 이해관계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시라카와 마사아키 지음, 박기영·민지연 옮김, 부키 펴냄, 3만5천원

경제성장률 추락, 부동산 버블, 세계 4위 수준인 지디피(GDP) 대비 가계부채율, 고령화와 인구 감소.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이다. 우리는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야 할까.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가 ‘일본 경제 격변의 30년’을 통찰한 회고록이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나와 타인을 쓰다
베스 케파트 지음, 이지예 옮김, 글항아리 펴냄, 1만9천원

삶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다. 그런 삶을 다루는 글을 쓴다면, 글 역시 진실과 거짓을 모두 포함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진실하게 적힌 언어는 우리를 겁먹게 하고, 우리를 자극”하므로 “선함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6권의 회고록을 집필한 작가 베스 케파트가 알려주는 ‘삶을 서사화하는 방법’.


바우키스의 말
배수아 등 지음, 은행나무 펴냄, 1만7천원

배수아 작가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우키스’란 인물을 모티프로 쓴 작품 ‘바우키스의 말’이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문지혁, 박지영, 예소연, 이서수, 전춘화 등 다섯 작가의 수상 후보작도 함께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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