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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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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30년사 <광장에 선 의사들>
등록 2017-12-01 04:17 수정 2020-05-03 04:28

순진무구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티 없이 순진하다’고 풀어놓았다. 무구(無垢). 때가 묻지 않았다는 뜻인데, 석가의 제자 유마(維摩)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말은 유마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얘기다. 이들의 30년 역사를 정리한 책이 (이데아 펴냄)이다. 최규진 인하대 의대 교수(의사학·의료윤리)가 정리했다.

인의협 창립일은 1987년 11월21일이다.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뜻있는 의사들을 모았다. 인의협이 함께한 보건의료운동사를 담은 이 책은 곧 한국 사회의 굴곡과 맥을 같이한다. 이 점을 지은이는 이렇게 또렷이 밝혔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건강을 고민하는 것은 의사의 사명이고 그것을 도모하기 위해 인의협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의사들에 의해 실현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즉 많은 투쟁들이 기술되었지만, 그 투쟁들은 수많은 보건의료인들과 노동자들의 연대 그리고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의협의 모든 실천은 그 연대와 힘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임을 밝힌다.”

인의협 창립 뒤 첫 ‘사건’은 상봉동 진폐증 문제였다. 사건의 발단은 1986년 11월 박길래씨의 탄분침착증 확진. 탄분침착증은 석탄 분진의 흡입으로 생기는 진폐증이다. 그런데 박씨는 탄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 소송 대상은 박씨의 집 근처에 있던 연탄공장 강원산업이었다. 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가 무료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변론을 맡았다. 인의협은 진폐증 조사 소위원회를 꾸렸다. 재판 쟁점은 석탄 분진이 진폐증 원인이라면 왜 박씨한테만 발병했느냐는 것. 조사 결과, 박씨와 동일한 원인으로 진폐증이 확인된 주민이 세 사람 더 발견됐다. 재판 결과는 청구액 9100만원 중 1천만원 배상. 일부 승소였지만 사법부가 환경문제로 비롯된 주민 피해를 인정한 ‘공해병’의 첫 사례가 됐다.

이처럼 책에는 병원에 갇히지 않고 사회로 뛰어든 인의협 의사들이 당대 사회의 모순·부조리와 부닥치며 동분서주한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갈무리돼 있다. 노동자 건강권(문송면군 수은 중독 사건, 원진레이온 사건), 의문사 진상 규명(이철규 의문사 사건), 반핵 평화운동과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 폐쇄 운동, 의료제도 개혁 운동, 북한 어린이 의약품 지원 운동,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와 의약분업, 영리병원 저지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운동, 광우병 촛불과 쌍용차 파업, 희망버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 사망, 그리고 박근혜 국정농단과 탄핵 촛불….

책은 한 단체의 활동 이력을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사회’를 향한 웃음·슬픔·절망·희망과 동행한 역사이자,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기록이다. 한발 더 나아가고픈 독자에겐 인의협 의사들의 육성을 담은 (개정판, 부키 펴냄, 2017)가 맞춤하다.

전진식 교열팀장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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