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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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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라는 자랑스러운 이름

소설가가 쓴 페미니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등록 2018-07-03 17:19 수정 2020-05-03 04:28

2000년 대학에서 과/반 학생회장을 했다. 정치적 의식이 높아서는 전혀 아니었고, 그저 학생자치기구인 학생회를 대표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 기간에 관심 가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집회가 있으면 후배들에게 알리고 함께 나가기도 했지만,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운동권’은 정치적 각성 정도도 훨씬 높고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저 그들이 외치는 ‘학우 여러분’ 중 1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들과 이야기하는데 한 후배가 ‘운동권’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나라는 얘기를 듣고 엄청 놀랐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데모 데리고 나가는 선배’라고.

물론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게 두려워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어쨌든 그 단어가 쓰이는 맥락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으니까. 당시 운동권 이미지 중 하나는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는다는 것인데, 운동권 소리 듣지 않으려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학점도 잘 받으려 노력했다. 운동권은 사고가 경직됐다는 이미지도 있었던 것 같다. 한 후배가 동기들과 이야기하다 나에 대해 ‘운동권치고는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괜히 혼자 뿌듯해했던 기억도 있다. 학생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살아남으려면 ‘수업 잘 듣는 운동권’ ‘사고가 유연한 운동권’ ‘스타일이 좋은 운동권’, 이런 수식이 필요했나 싶다.

그러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났다. “남자를 미워하지 않으며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 물론 그 유쾌한 농담에 잠시 웃기도 했지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는 이야기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페미니스트라면 남자를 미워하고 화장도 하지 않고 자신을 가꾸는 것을 싫어하고 늘 불행하며 자기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그 수많은 공격이 이 한 문장에 모두 녹아 있었다. 이는 지금 한국의 페미니스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페미니스트라는 말만 보면 짜증부터 내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한때 “쟤 운동권 아냐?” 했던 말이 “쟤 페미 아냐?”라는 말로 대체된 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책에서 전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는 이렇다.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저자가 찾아본 사전에서 가져온 풀이다. 이 좋은 말이 왜 이렇게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게 많아서 나서지 못하지만, 누군가 날 페미니스트라 불러준다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울 것 같다.

정회엽 원더박스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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