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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선망증

등록 2017-01-11 20:46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고백하건대, 아내의 ‘육아휴직’은 부부 관계를 다시금 규정하게 했다. 집에 아내가 있다는 게 뭔가 든든했다. 택배 받는 일은 기본이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가 따듯한 오후 간식을 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늦게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당연히 (차려진) 저녁밥도 먹을 수 있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아이 손을 잡은 아내의 마중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싶었다. 물론 그 생각들을 아내에게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여자들은 아내를 얻지 못한다”

독박 육아 9개월, 휴직 10개월에 접어든 아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내가 다른 사람의 밥걱정으로 하루를 다 보내야 하니?” 못 들은 척해도 됐는데 내 딴에는 ‘해법’을 제시한다고 말을 보탰다. “그럼, 사먹을까? 이유식은 시켜먹으면 되잖아.”

내심 귀찮았다.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해놓곤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묻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재촉으로 느껴졌다. 미리 소분해놓은 재료로 이유식을 만들 때는 ‘굳이 이 일을 해야 하나’ 싶었다. 재료는 늘 남거나 모자랐고, 적당히 갈았다 싶었는데 어떤 재료는 덜 갈리거나 꼭 더 갈렸다. 그때마다 아내가 던진 말들이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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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먹자는 말에 아내는 세상 둘도 없는 한심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짧게 쏘아보더니 “됐다”고 했다. 분명 ‘너랑 무슨 얘기를 하니’는 감춰져 있었는데, 들렸다. 반토막이 사라진 가계 수입에 대해 뭐라고도 했는데 귀찮아 안 들었다. (들어야 해법도 없는걸.) 이후에도 아내는 ‘회식’에 대해 말하고, ‘야근’에 대해 말하고, 씻을 시간이 안 생기는 본인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 말했다. (듣고도 해줄 말이 없어) 나의 대답은 늘 “힘들어서, 어떡해”였다. 두 (사내)아이 육아가 ‘아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음을 멀뚱히 지켜보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선택한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혼자 삼켰다. 아내와 내가 ‘우리’인데, 아내는 플레이어였고 나는 자주 관찰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동양북스 펴냄)이란 책이 뒹굴었다. 아이 책을 사러 동네 서점에 갔다가 스스로에게 선물로 주려고 사왔다고 했다. “그럼 내 것도 뭐 사오지” 했더니 또 세상 둘도 없이 한심한 사람을 보는 표정이 스쳤다. 두 아이가 모두 잠든 행운의 시간, 우연찮게 책을 잡고는 홀린 듯 넘겼다. 읽는 내내 계속 잽을 맞는 것처럼 얼얼했다. 그러다 크로스카운터가 된 문장을 맞았다. “남자들은 아내를 얻지만 여자들은 아내를 얻지 못한다.” 아내의 육아휴직 때 막연히 품은 생각은 ‘아내 선망증’(wife envy)이었다. ‘할 만큼 하고 있다’는 안온한 자기애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됐다.

여성은 공/사 모두에서 일한다. 고작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인식을 가진 남자들이 평생 한 번도 갖지 않을 ‘강박’에 시달리며 산다. 예컨대, 누군가 아무렇게나 버려놓은 귤 껍질을 치우는 건 아내의 몫이다. 젠더와 가사노동의 불평등 문제가 여전히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고 있지 않다는 점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청소, 빨래, 쓰레기 버리기로 집안일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아마 ‘주방, 욕실, 빨래 용품, 육아 소모품’의 주문 주기는 모를 것이다. 빨래를 한들 그걸 어떤 방식으로 개서 정리하는지 주도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집안일을 많이 하는 남자라도 남자 역할은 여자가 곧바로 대체 가능하지만, 여자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남자는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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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두의 패배

이 비극은 도와주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의 저자는 말한다. “일터에서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관심을 가질 뿐, 가정과 일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고. 그 결과는? 모두의 패배다. 여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계속되고, 남자들은 일터에 갇혔다. 모두가 고군분투하는데,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의 부부 관계는 다시 규정돼야 한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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