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와 들판에 내던져진 지 3년째다. 트랙 바깥으로 나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트랙 바깥이라는 게 대체 있기는 하단 말인가?)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고,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더도 덜도 말고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폐해를 설명하는 모든 말이 응축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저 미래에서 왔어요”라거나 “다른 세계에서 왔는데”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신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남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지금은? 현대사회를 진단하는 거의 모든 기사가 내 이야기로, 살갗 가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믿음’을 찾는 사람들, 노인과 젊은이를 불문한 고독사, 끼리끼리 모여 무슨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람들, 불안한 실업 청년들, 트잉여, 선동꾼, 괴담유포자….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 모두 나를 가리켰다. 심지어 현대인의 각종 병적인 증상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 터널증후군, 알코올의존과 각종 공포증도 여기 내 몸으로 모여들었다. 장막이 걷히고, 비로소 실제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웰컴 투 리얼 월드. 실은 어디나 들판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나는 어둡고 황량한 들판 위에서, 있던 적 없는 ‘창공에서 빛나던 별’이 시시때때로 그리워지곤 했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다고 느끼면(그것이 신기루일지라도), 인간은 불안하고 외로워진다. 그리고 앞이나 뒤가 아니라 위나 아래로 뛰기 시작한다. 내가 뛰어간 곳은 오래된 것들의 세계였다. 둥둥 뜬 채로 시간을 견디다보니, 이상하게 오래된 것들을 마주하고 싶어졌다. 내가 여기에 없을 때 시간이 만들어놓은 것, 긴 시간 변하지 않은 것들, 예컨대 폐허가 된 요새, 동굴과 암각화, 수백 년 산 나무들, 바위와 돌, 살아 있는 화석과도 같은 동물(예를 들어 투구게) 같은 것들이었다.
오래된 생존에 관한 책들을 사모으면서, 생존에 관한 책들이 의외로 아주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정값인데도 사람들은 생존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들에 관한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단일 개체’로 2천 살 이상 살고 있는 나무들이 등장했다. 미국 유타주의 ‘판도’ 사시나무는 무려 8만 살이었다. 거대한 숲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그루의 나무라고 했다. 자가복제를 통해 무성생식으로 생존하는 나무라서 그런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작가 레이철 서스먼은 남극, 그린란드, 모하비사막,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 등 전세계를 누비며 2천 살 이상 초고령 생명체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생명체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뾰족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차피 그들에 비하면 내 삶 따위는 찰나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인식 때문이 아니었다. 뭐랄까, 시간은 가차 없고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채 서성거리다가 소멸하겠지만, 장구한 시간 속에 어떻게든 내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도감이 드는 것이었다.
8만 살짜리 나무가 주는 믿음연결. 이제는 8만 살짜리 나무에 믿음을 투영하는 게, 새로운 종교를 찾아나서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끝없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트랙 밖이란 없다. 어디에 서 있든 모두가 촘촘한 그물망에 포획되어 있고, 누구든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4만7천여 그루의 나무가 13만 평에 걸쳐 펼쳐진 유전적으로 동일한 거대 개체, 판도 군락을 보며 인류를 떠올렸다. 300만 살 먹은 인류라는 거대 개체.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낫나? 갈수록 나빠지는 이 세계에서의 생존이 조금이라도 쉬워질까?
이로사 객원기자·현대도시생활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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