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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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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만세

돈은 은행에 가면 많고 나쁜 놈은 교도소에 많고 남자는 우리 섬에 많네
등록 2015-07-24 16:25 수정 2020-05-03 04:28

얼마 전 어느 술집. 내 옆 좌석에선 술꾼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 비슷한 이력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심드렁했다. 섬에서는 어제 본 사람 오늘 또 보고 오전에 만난 사람 오후에 또 만나고 심지어는 조금 전 헤어진 사람을 다른 곳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일행이 된 상태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새로 인사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뭐한, 말 그대로 뭣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다.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거시기… 저기, 천주교 아가씨들”

그러니 술집에 앉아 있어봤자 주고받을 이야기는 늘 부족하다. 그렇다고 조용히 마시는 경우는 없다. 어떤 말이라도 떠든다. 두 사람도 그랬다. 예전에 한 말, 조금 전에 한 말, 다음에 또 하게 될 말, 안 했으면 좋겠는 말,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중구난방 떠들다가 예의 그 술꾼이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아까 여자 둘 들어온 거 내 눈으로 진짜 봤다니까.”

“글쎄, 그 여자들이 누구냐니까?”

“저기 있잖어. 거시기.”

“….”

“아따, 저 뭐시냐. 이렇게 생긴 옷 입고, 기도도 하고 그러는….”

“그러니까 그 여자들이 누구냐고.”

“아따 참말로… 저기, 천주교 아가씨들.”

들어보니 그날 오후 배로 수녀(修女) 둘이 섬에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이곳 거문도에는 천주교 공소가 있어 간혹 그들이 오기는 한다. 그는 수녀라는 단어가 안 떠올랐던 것이다.

“아.”

수녀님이 졸지에 아가씨 되는 순간. 그 논리대로 한다면 비구니는 불교 아가씨, 원불교 정녀는 원불교 아가씨가 된다. 인도나 티베트의 여신(女神)들도 아가씨며 성모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또한 신부(神父)들은 천주교 총각, 비구는 불교 총각이 되겠다. 어쨌든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천주교가 아니다. ‘아가씨들’이 섬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섬에 젊은 여자들 없어진 지 한참 된다. 사람 사는 보편적인 장소라면 남녀 비율이 비슷해야 하는데 여긴 그렇지 못하다. 대표적인 젊은 여자 기근 지역이다. 돈은 은행에 가면 많고(개인 금고나 벽장, 장판 아래에도 많겠지만), 나쁜 놈들은 경찰서·교도소에 많고(밖에도 넘쳐나지만), 남자들은 우리 섬에 많다. 군대 비슷하다. 거문도가 속한 삼산면에는 초도와 손죽도 같은 섬도 포함되는데 그곳은 한적한 시골 같아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관광지에 어업전진기지라 젊은 남자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러니 낯선 여자 한 명 들어오면 모든 눈길이 모인다. 그냥 총각, 노총각, 거의 총각, 대략 총각, 흡사 총각들이 특히 그렇다. 대부분 누구네 딸이나 손녀로 판명이 나서 ‘아이구야, 정말 많이 컸다’로 끝나지만 연고가 없는 이가 들어오면 관심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어떤 여자가 와도 그렇다. 아마도 아가씨, 거의 아가씨, 예전엔 아가씨, 다 포함된다.

몇 년 전, 20대 초반의 한 아가씨가, 정확히는 대학교 휴학생이 이곳엘 들어온 적이 있다. 내 강연을 몇 번 들었던 아이였는데 책도 몇 권 찾아 읽더니 배짱 좋게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무작정 미용실 찾아가 배를 타겠다고 했단다. 기겁을 한 동네 아줌마들이 식당을 소개해주어서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각종 총각들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 식당 손님 평균연령이 한동안 쑥 내려갔고 매상은 올랐다. 그 아이는 떠나고 지금 없다.

와이키키 해변이 된 내 집 앞바다

뜻밖의 풍경도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초여름이면 외국 아가씨들 수십 명이 들어오곤 했다. 내가 사는 곳은 해수욕장의 유일한 집이다. 깔깔거리며 금발 은발 갈색 머리카락 휘날리며 뛰어다니는데 대부분 푸짐한 몸매들이라서 내 집 앞바다가 졸지에 와이키키 해변이 된 듯했다. 비명은 또 어찌나 질러대던지.

나중에 듣기로 원어민 강사 모임이라고 했다. 그들은 해수욕장에서 떠들썩하게 놀다가 비키니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했다. 노인들부터 눈이 돌아갔으나 야단친 사람 아무도 없었다. 한국 여자라면 그들은 야단을 친다. 어디서 함부로 볼썽사납게. 물론 그들이 외국 여자들에게 야단을 안 친 이유는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는 꼭지를 봤다고 하고 누군가는 털도 봤는데 머리카락과 색깔이 다르더라는 증언이 안개처럼 떠돌았다. 올해는 아직 안 왔다. 아마도 온다면 섬마을 청년들 속이 더 타고 영감님들은 수명 연장 효과를 볼 것이다.

젊은 한국 여자들이 단체로 찾아오는 경우도 간혹 있다. 나 때문이다. 작가와의 만남 같은 문학기행을 오니까. 그런 행사에는 주로 여자들이 참석하니까. 그럴 때 나에게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후배와 친구들, 여럿 된다. 나도 그들이 필요하다. 이 옌네들이 들어오면 최소한 가두리양식장에 가서 낚싯대라도 들고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안면 있는 양식장 주인과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언젠가 후배 가두리 갔을 때이다. 저녁이 되자 그는 배에서 전기선을 따와 아주 밝게 불을 비추어주었다. 다른 친구는 자신의 배를 직접 몰고 그녀들을 이동시켜주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 아가씨들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비명과 웃음, 울음은 세계 공용의 언어이다. 덕분에 내 직업은 작가에서 잠깐 동안 ‘인력공급책’으로 바뀌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회에 분내라도 실컷 맡으라고 내가 권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영 좋구만.’ 그렇게 왁자하니 놀다가 그녀들이 일제히 떠나고 나면 다시 권태롭고 심심하고 처량맞기까지 한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덕분에 내 주변 사내들 뇌에서는 남녀 호감을 느낄 때 나오는 도파민만 가득했다. 페닐에틸아민이나 옥시토신은 분비되지 못했다.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술집 아가씨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

섬 청년이 육지 아가씨와 맺어질 확률이 로또 당첨과 비슷하다고 하면 좀 과장인가. 암튼 로또 사는 사람들 계속 있고 또 당첨되는 사람도 나오듯 성공 사례도 없지는 않다. 수협에 근무하는 한 후배는 지인의 소개로 육지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전 인사차 데리고 왔을 때 동료들은 혼신의 힘으로 그를 도왔다. 배에 태우고 섬을 한 바퀴 돌았으며(마을 뒤편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볼 만하다) 다이빙과 낚시를 하고 회를 떴다. 그리고 저녁마다 식당에 빙 둘러앉아, 섬이 나쁜 곳만은 아니며 이곳에 살면 오늘 같은 재미를 날마다 맛볼 수 있다, 는 소리를 되풀이했는데 노력이 너무 과해 역효과 날 뻔도 했다. 그 노력 속에는 사인이 들어간 내 책도 들어 있다. 그 아가씨는 시집을 오면 해녀가 되겠다고 씩씩한 포부를 밝히기도 했으나 식 올리기 무섭게 아이를 가졌고, 그리고 낳고 기르느라 아직 물질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둘째를 가져버렸기 때문에 언제 해녀가 될지 요원하기만 하다.

오래전에는 술집 관련 아가씨들이 많았다. 전주옥, 이화장, 이런 곳 말이다. 시대가 바뀌어 모두 없어지더니 한동안 다방 전성시대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내들이 젊은 여자와 말 섞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단란주점 몇 개 들어서더니 다방이 없어지고 그 여파로 아가씨들 수도 쫄아들어버렸는데 이젠 그나마 거의 휴업 상태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고깃배들이 나로도나 여수로 직접 고기 푸러 들어가면서 영업이 영 말씀이 아니란다.

몇 년 전까지 거문도 통틀어 유일하게 영업을 하던 단란주점에는 아가씨가 두 명 있었다. 아우는 50대 중반, 언니는 환갑이었다. 나는 이 둘을 여러 번 봤는데 이른 오후 산을 타러 올라가는 길목에 내 집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때 나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환갑 처녀가 늘 앞장을 섰다. 둘이 산을 타는 이유가 건강 때문이기도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시기 위해서라는 게 주변의 짐작이었다.

뱃사람들이 들어오면 그곳엘 갔다. 놀이가 다 끝나고 나오면서 그들은 불평을 했다. ‘씨발, 술도 드럽게 많이 처먹네.’ 그러나 다음날 저녁 그들은 또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말했듯이 화류계 아가씨가 둘뿐이기 때문. 그리고 비틀거리며 나오면서 어젯밤에 했던 욕을 다시 했고 두 아가씨는 다음날 또 산을 타며 땀을 뺐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내 10대 후반까지만 해도 남녀 비율이 비슷했다. 그 시절에는 마을마다 대동놀이가 있었다. 울다가 죽은 돼지가 솥 안에서 푹 삶아지는 동안 해안 자갈밭에서는 남자 대 여자 줄다리기 시합을 했다. 주민을 남녀로 구분해서 양쪽에 세우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자 편에서 힘센 남자 몇몇 빌려가기도 했다. 어기영차, 힘을 쓰며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떠들썩한 활기가 넘쳐나곤 했다.

1970년대부터 농촌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그들은 모두 도시 외곽에 자리를 잡은 다음 제조업 저임금 노동자들이 되었다. 이런 이촌향도의 물결은 박통이 만든 국가정책이었다.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쓰면서 농촌도 함께 망가져갔다. 그 현상은 몇 년 뒤 섬에도 나타났다.

최소한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가

내 선배 세대들부터 섬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여자 동창들은 특히 그랬다. 몇몇은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여럿이 방직공장 부설 산업체 고등학교로 갔다. 그때부터 섬에는 아가씨들이 없어졌다. 이제 갱년기 장애를 겪고 있는 그녀들은 고향 섬을 그리워는 하지만 다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섬 생활 불편의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렇게 공동체가 무너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곳이다.

한 번씩 서울 같은 대도시에 나가면 맨 처음 느끼는 것은 소음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멋진 아가씨들이 정말 많다는 것. 그러니 육지의, 도시의, 결혼하거나 연애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총각들이여, 그대들은 아주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기회는 끊임없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가.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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