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딱 한번 말(馬)을 탔는데 도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낙마 확률 100퍼센트이다. 내가 100퍼센트를 기록한 유일한 경우이다. 쇄골이 깨지고 얼굴은 아주 피범벅이 되었다. 전치 8주 나왔다. 이렇게 된 사연이다.
예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 노릇을 할 때였다. 몽골 작가협회와의 교류 사업으로 몇몇 선배 동료 작가들과 몽골에 갔다. 그곳에 대한 첫인상. 하늘보다 땅이 넓었다. 땅은 위대하다는, 뻔한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부동산은 위대하다, 가 아니고).
울란바토르에 도착해서 이틀 동안 행사를 했다. 사회주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곳 작가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약간은 지루했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역시나 대륙은 시(詩)였다. 소설가가 드문 이유이기도 했다. 그곳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시낭송 대회를 TV로 생중계한단다.
잠깐, 사흘 뒤 초원에서 보았던 장면 하나. 차로 달리다보니 게르 한 채가 있었다. 20분 뒤 그 게르를 향해 걸어가는 한 아이가 있었다. 10분 뒤 또 다른 게르가 있었다, 그 외는 그저 광활한 땅이었다. 그러니까, 옆집 가서 망치 좀 빌려오너라, 해서 아이가 심부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리는 30킬로미터 정도. 공간과 이동의 개념이 우리랑 너무 달랐다.
하늘보다 땅이 넓었다
앞으로 돌아가서 행사장. 유럽으로 유학 다녀온 젊은이들을 지목하며 노시인이 우리에게 탄식했다. 거기만 다녀오면 죄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을 떠벌리는데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으니 혹시 설명해줄 수 있냐는 것. 나중에 나도 탄식했다. 30킬로미터 떨어진 옆집을 자연스럽게 다녀오는 꼬마.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면 모은 돈을 들고 혈혈단신 유럽으로 건너간 다음 그 다음해 중고 지프를 사서 몰고 나타난다는, 농경민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보의 유목민 전통을 두고 무슨 얼어 뒈질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국경)와 금지(접근하면 쏜다!)에 대한 혐오로 군사를 일으켰던 유목민의 정서는 오늘날 이동과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인터넷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떠난 초원 트레킹. 지프 두 대와 소형 버스 한 대로 첫날 500킬로미터 정도 이동했다. 우리나라와 몽골 작가들, 그리고 다섯 명의 통역과 여타 조력자들 모두 함께.
점심시간. 커다란 하천 근처에서 그들은 차에다 빵을 먹었고 우리는 라면을 끓였다. 그때 문득 보았던 풍경. 열두 살 정도의 소녀가 긴 머리카락 휘날리며 커다란 말을 타고 있었다. 안장도 없이 말갈기를 잡고서. 그 뒤를 아홉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누나보다 좀 작은 말을 타고 뒤따라 달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말 달리는 어린 남매. 칭기즈칸 보드카를 마셨을 때보다 삼천 배 정도 되는 감동이 밀려왔다.
저만큼 언덕 위에 게르를 조립하는 부부가 보였다. 나는 준비해왔던 크레파스와 필기도구, 노트 따위를 한 보따리 들고 걸어갔다. 젊은 부부였다.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는지 아이들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선물을 받아든 그들은 그다지 고맙다는 표시를 내지 않았는데 그게 그들의 특징으로 보였다(솔직히 말하면, 내가 만난 몽골인 대부분은 자신을 칭기즈칸으로 여기는 듯했다).
뒤따라 도착한 몽골 작가들과 젊은 부부가 대화를 나눴다. 거기서 약간의 예기치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우리와 동행한 노시인이 아낙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것. 다시 내려온 우리는 기다렸다. 조금 뒤 정장을 하고 부부가 찾아 내려왔다. 노시인은 정좌로 앉았다. 부부는 말 그대로 공손하게, 특히 아낙은 반 무릎 꿇고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는 지극하게 절을 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미안해서 차마 찍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아쉽지만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였다.
전속력으로 내리막길을그리고 지천으로 널린 허브. 그것의 향기. 동아줄을 타고 내려온, 내가 사는 섬보다 더 낮게 내려온 별들을 만났다. 이 자식, 말(馬)은 언제 나오는 것이냐, 하는 분 있으실 것이다. 이제 나온다. 여행자용 게르에서 자고 나서 드디어 몽골 말을 타보는 순간. 경주마나 전날 어린 소녀가 탔던 그런 크기가 아니었다. 제주 조랑말보다 약간 큰 정도로 나를 태우고 자박자박 걷는 것이 전부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랫배를 가볍게 차보기도 했다. 달려봐, 달려보라구, 그러나 달리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해도 딱 그 정도의 속도만 유지했다. 그렇게 훈련된 듯했다. 그렇게 말을 타고 오르막을 올라 칭기즈칸 박물관(이라고 초원 곳곳에 만들어놓은, 여러 개 중 하나)에 갔다. 구경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점심 먹을 시간에 맞춰 우리는 박물관을 나왔다. 그때 가이드가 말했다. 말 타고 가실 분은 다시 타고 가세요. 그렇다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내가 탔던 말에 올랐다. 올랐다, 까지만 내 판단이었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통역 중 한 명이 급히 달려와 말에 올랐는데(내 말 바로 옆이었고 우리 숙소에 급히 볼일 있어 보였다. 이를테면 점심 관련한) 그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덩달아 내 말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속력으로, 그것도 내리막을. 미처 고삐도 잡기 전이라 나는 안장 앞쪽에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조그마한 고리를 붙잡았는데 느닷없이 다가온 전속력의 질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다 뭣되겠구나,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 말 머리가 앞의 말 엉덩이에 거의 닿을 뻔했고 어떤 때는 부딪히기도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원래 말이란 게 친구가 달리면 무조건 따라 달리는 습성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사정없이 달려 내리막을 내려온 말은 숫제 점프도 했다. 건천처럼 보이는, 돌멩이가 어지럽게 박혀 있는 곳에서 결국 나는 허공으로 날았고 곧바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엄청난 충격과 고통. 숨이 막혀 호흡이 되지 않았다. 얼굴과 어깨의 통증이 가장 심했는데 그 통증을 분산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이시영 선생께서 내려다보며 정신이 있는가 물었다. 내가 되물었다.
“아니, 신경림 선생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시영 선생이 대답하셨다.
“농담하는 거 보니 머리는 괜찮구만.”
나는 나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게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게르로 나는 치워졌다. 그곳에서 얼굴이 박살 나 있고 쇄골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시인이 찾아와 뭐라고 계속 말을 했다. 통역에 따르면 그동안 말에서 떨어졌다가 살아난 사람들 이름이라 했다. 몽골에서는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나쁜 사람, 살아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가 내려온단다. 세상 어디든 좋은 사람 되기란 이렇게 힘든 모양이다.
낙마 뒤 살아난 ‘좋은 사람’우연히 근처 마을에 왕진 온 의사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한눈에 내 상태를 알아봤다. 우리는 보드카를 잔뜩 따라 건배하고 마셨다. 그리고 뼈를 맞췄다. 낯선 타국에서의 부상. 나는 몸이 아팠고 마음이 괴로웠다. 뼈를 맞추고 나자 그 의사는(이른 시간인데도 그는 이미 상당량의 보드카를 마신 상태였다. 우리도 예전에 그랬잖은가. 의사가 시골 마을에 직접 찾아와 진료해주면 먼저 날계란에 소주부터 대접했으니까) 압박붕대로 어깨와 가슴을 좌우 번갈아가며 ×자로 동여맸다. 나중에 내가 ‘마징거젯트 브라자’라고 명명한 그 방식은 다음날 갔던 울란바토르 국립병원에서도, 한국의 대형 병원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들어보니 몽골 사람들은 가장 많은 낙마 사고를 겪었고 그 덕에 가장 좋은 치료 방식이 그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냥 있거나 아니면 지프로 이동하겠다는 내 의견은 묵살되었고 결국 헬기를 불렀다. 몽골에 단 두 대 있다는 헬기 중에 한 대가 온 것이다. 들것에 실려나가자 예의 노시인부터 몽골 일행 모두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입술을 댄 사람도 있고 눈물을 훔치는 아줌마도 있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어서 내가 더 미안했다.
그런데 이놈의 헬기가 좀체 뜨지를 않는 것이다. 1시간에 1천달러인가 2천달러 주기로 하고 불렀다는데 말이다. 20분이 지나도 그대로 있기에 나는 보호자로 동행한 이에게 왜 이러냐고 물었다. 그는 바깥을 내다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다들 사진 촬영하고 있는데.”
헬기를 가까이서 본 기념으로, 단체 몇 장, 독사진, 이인 일조, 삼인 일조, 사인 일조 이렇게 사진 찍느라 그들은 바빴고 그거 모델 해주느라 헬기는 30분 뒤에 떴다. 한국 와서도, 회복된 다음에도, 정말 궁금한 것 하나. 도대체 말이 왜 갑자기 그렇게 빨리 달리기 시작했을까. 그 궁금증은 몇 년 뒤에 풀렸다.
갑자기 달려와 내 옆의 말을 몰았던 통역이 몽골 작가협회 사무실로 찾아와 그때 말에서 떨어진 한국 소설가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왔단다. 다행히 회복되어서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실직고했단다. 일부러 그랬다고.
몇 년 뒤 알게 된 진실요약하자면 그가 한국어를 배우게 된 것은 아내 때문이었고, 한국에 나가 있던 아내가 그만 한국 남자와 정분이 나서 이별을 통보해왔고, 그래서 한국 남자들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고, 며칠 뒤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그렇다면 그중 한 놈을 골라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게 하필 나였고, 기회를 노리다가 내가 올라타는 순간 쫓아와서 내 말고삐를 잡고 인정사정없이 달렸다는 것. 떨어질 때까지.
그 실토가 작가회의 사무실을 통해 이 먼 바닷가까지 전달되었다. 비로소 내가 말에서 떨어진 이유와 과정이 이해되었다. 나는 역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제라도 알려주어서 고맙다. 이렇게 나를 엿 먹인 것으로 대신 한국 남자들에 대한 마음을 풀어주기 바란다….’
살다보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연애 때문에 생긴 파란을 이렇게 엉뚱한 놈이 몸으로 때우는 경우도 있다.
한창훈 소설가※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