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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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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보고 싶다

바람이 불고 섬에서 멀어지자 문득 생각난 사람들…
눈 속으로 사라진 여인, 목숨을 살려준 서점 주인, 잊지 못할 섬 소녀
등록 2016-03-17 22:07 수정 2020-05-03 04:28

살다보면,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그 존재가 마치 새처럼, 바람처럼 나를 찾아왔거나 또는 오래전에 둔 파스를 찾으려다 우연히 발견한 묵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기억의 터널 속으로 빨려드는 것과 같은 상황 말이다. 어제가 딱 그랬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북서풍이 잦아들면서 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습기가 밀려오자 저 멀리 보이던 섬이 조금씩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동안 못 봤던 것들이 빈자리를 채워버린 것이다. 기억이자 추억의 엄습이었다.
그 엄습은 새벽 어장 나갔던 배가 줄이어 돌아오듯, 그 배에서 생긴 물보라가 내 발밑까지 밀려오듯 그들의 안부와 (물론 그중에는 죽은 사람도 들어 있지만) 근황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방으로 들어와 떠오르는 사람을 호명하듯 한 명씩 적어보았다. 이렇게.

80년 광주, 시민을 구원한 투수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1. 함박눈 속으로 사라진 여자  스물한 살 되던 겨울 나는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다. 함박눈이 푹푹 내리던 날 여자 혼자 들어왔다. 화려하고 세련된 외모였다. 그녀는 가장 비싼 안주를 세 개나 시켜놓고 술을 마셨으며 내게 따라주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데이트를 하다가 다퉜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서 들어왔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술도 잘 마셨다. 그녀가 함께 눈길을 걷자고 해서 우리는 사태 난 듯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연인처럼 걸었다. 십 분 정도 뒤 공중화장실로 오줌을 누러 갔고 나는 기다렸다. 머리에 얼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계산도 안 했는데 말이다. 너무 많이 마셔서 삼십 년 넘게 오줌을 누는 중일 수도 있다.

2. 해태 타이거즈 투수 방수원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의 선발 패전투수. 그해 6승. 주로 중간계투 또는 패전처리. 그러나 1984년 5월5일 삼미전에서 KBO 리그 사상 첫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사나이(아이러니하게도 그 경기가 그해 유일한 승리). 통산 기록 18승 29패 18세이브에 평균자책 3.75. 어릴 때 잃어버린 동생을 야구장에서 찾았으며 그의 이름은 원래 그 동생 것이었다, 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아주 깡마른 체격으로 주로 변화구를 던졌다. 어떤 이들은 그의 투구를 보며 직구를 던져도 힘이 약해 중간에 변화구로 바뀐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그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0년 광주. 계엄군이 지나가는 학생, 시민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패고 차고 찌르던 시절. 그는 총칼을 든 군인들에게 맨몸으로 덤벼들어 격투 끝에 시민, 학생을 구출해냈다. 여러 차례 그랬다고 들었다. 그게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는, 당시 나도 광주에 있었기에 잘 알고 있다.

3. 찬이 형  이십 대 초반 나는 첫 번째로 세상을 떠돌았다. ‘이 세상이 좁다고 느끼던 시절 나는 방랑자처럼 떠돌았네’ 정태춘의 노래 가사처럼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면서 일손이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고 기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사람 집 하숙생이던 찬이 형 방에 끼어들어 자게 되었다. 당시 스물여덟 뒤늦게 지방 국립대에 입학하여 다니고 있던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이미지였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과 수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단한 술꾼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벽장에서 소주를 꺼내 한잔씩 마시고 다시 책을 봤다. 몇 잔 더 마시고 자리에 누워서도 단어장을 들고 암기를 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단어장은 그대로 들고 있었다. 허공에 있던 손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한참 걸렸다. 술과 공부가 어떻게 만나는지 나는 그를 보고 알게 되었다.

허기도 채워준 안내원 아가씨

4. 중앙고속 안내원 아가씨  20대 중반 겨울. 나는 광주에서 대전을 가야 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터미널에서 서성이며 밤을 새운 다음 새벽 일반고속을 탔다. 그때는 일반고속이라는 게 있었다. 간이 승차장마다 들르는, 이를테면 완행고속이었다. 나는 첫 번째 간이 승차장까지만 가는 티켓을 끊었고 흔히 안내양이라고 부르던 아가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몰골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눈감아주었다. 밤 내내 떨었기에 버스 의자가 얼마나 따스하고 편안한지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휴게소에서 그녀가 오뎅과 김밥을 내게 주었다. 사양을 하자 자기가 직접 돈 주고 산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내내 굶었던 배도 덕분에 허기가 가셨다.

대전이 가까워지자 혹시 다른 도시로 더 가야 할 계획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괜찮다며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내렸다. 나 같은 동생이 있었는지 그녀는 멀어지는 내 모습을 측은해하는 얼굴로 한동안 더 바라보았다. 내가 중간에 돌아봐서 알게 된 것이다.

5. 어떤 여고생  고3 겨울.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암울한 마음으로 겨울 찬바람 속을 걸어다니던 날이었다. 무심코 나와 마주친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윙크를 했다. 그리고 각자 길을 갔다.

6. 할머니  지난해 4월에 돌아가셨다. 무덤이 생겼다. 사람의 부재보다 무덤이라는 사물이 죽음을 선언하고 확인하게 해준다. 그 몇 뼘의 봉분이 삶과 죽음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강고한 벽이다. 그래서 살아생전에는 다들 다른 모습이지만 죽으면 같은 모습이 된다. 무덤 덕에 사람은 사람을 완벽하게 보낼 수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니다. 여러 해 전 할머니는 “요즘은 꿈에 죽은 사람들이 자주 보여야. 근데 괴롭지는 않더라.” 하신 적이 있다. 나는 근래 들어 할머니의 무덤 외형이 아닌, 그 속의 모습이 자꾸 보이는 듯하다. 미라처럼 말라가는 모습이 수시로 그려진다. 나도 그게 괴롭지는 않다.

7. 서점 주인  1987년 유월항쟁 때였다. 나는 같은 과 애들을 막걸리 사주겠다고 꼬여서 데모하러 나가곤 했다. 다들 누군가 먼저 시작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한번은 나와 내 막걸리파들이 가장 먼저 구호를 외치며 치고 나가게 됐다. 사과탄 예닐곱 발이 동시에 내 주변에서 터졌다. 나는 피를 흘리며 백골단에게 쫓겼다. 발을 다친 상태로 이백 미터 정도 뛰어가다가 잡히기 직전 어떤 서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주인은 곧바로 셔터를 내리고 잠갔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쩌면 열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 슬퍼하지 마’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8. 울란바토르 신시가지에서 물건 팔던 영감과 어린 딸  저번에 말에서 떨어졌다고 했던 그 시절이다. 일행이 번화가 백화점엘 갔다. 나오는데 길가에서 늙수그레한 영감이(거기 사람들은 자외선을 워낙 많이 받아서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신문지 위에 조악한 물건을 몇 개 깔아놓고 있었다. 시장에서 떼다가 팔아보자고 마음먹었을 것으로 보였다.

건물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와서 그를 쫓아냈다. 가방을 꾸린 사내는 낙담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 정도로 보이는 딸이 아빠 손을 잡고 올려다보며 연신 뭐라고 말을 했다. ‘아빠 슬퍼하지 마, 다른 데 가서 팔면 되잖아, 응?’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언어를 몰라도 표정과 행동에서 그대로 읽히니까. 초라해져버린 유목민의 후예와 착한 딸. 조금 일찍 나와서 무어라도 하나 사주지 못한 나 자신을 나는 오랫동안 자책했다.

9. 저 먼 기억 속의 소녀  오래전 우리 섬마을에 한 소녀가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심성도 고왔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잘 걷지를 못했다. 친구들이 중학교 졸업 때까지 번갈아 업고 학교엘 다녔다. 그녀가 맞은편 섬 등대에 가고 싶어 하면 감자와 오꼬시(강정) 따위를 싸가지고 업고 다녀오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친구들은 육지로 나갔고 그녀만 남았다.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고 비가 오면 비를 바라보고 해가 지면 노을을 바라보았다.

유일한 취미가 음악 듣는 거였다. 친구들이 가요나 팝송 테이프를 사서 편지와 함께 선물로 보내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친구들이 일제히 들어오자(그때도 다들 테이프를 사가지고 왔다) 비로소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비바람이 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바닷가에서 싸늘하게 식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스무 살도 안 되고 결혼도 안 했으니 어른들은 곧바로 애장터에 묻으려고 했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으니 장례를 치러달라고 그들은 호소했고 어른들은 거절했다. 끝내 의견 통일이 되지 않자 아이들은 스스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을회관이(그때는 동각이라고 불렀다) 분향소가 되었다. 사흘간 분향을 하고 소녀를 추억하며 상여에 쓸 종이꽃을 만들었다.

녹음기를 앞 상여에 매달고

출상 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깨달았다. 상여 앞소리 매길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은 늘 전담하는 어른이 있었으니까. 뒤늦게 어른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연습을 해보는데 잘될 리가 없었다. 그때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는 얘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면서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동의했다. 그 덕에 그동안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장면이 연출됐다. 상여 맨 앞에 커다란 카세트가 흰 광목천으로 묶인 것이다. 그렇게 상여는 그녀가 평소 들었던 팝송을 틀고 장지로 향했다.

나는 이 사연이 너무 가슴 아픈데다 그 친구들의 우정이 감동스러워 잊지를 못했다. 훗날, 소설로도 쓰고 영상으로 만들어놓고 싶어서 시나리오까지 썼다. 그 소녀가 계속 ‘내 이야기를 완성시켜줘’ 말을 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만들어졌다(홍보하는 것 같아 제목은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예쁘고 근사한 배우들이 당신과 친구들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요. 혹시 보고 있나요?’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하늘에 있을 소녀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순간 눈물이 났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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