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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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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파고를 이기는 방식

북서풍의 한기를 소주로 달래는 섬의 겨울… 알파고도 쓸쓸함의 미학은 사람처럼 못하겠지
등록 2016-03-31 20:14 수정 2020-05-03 04:28

이번 겨울도 시베리아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얼음장 같은 북서 계절풍이 자주 불었다. 이것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바람도 없어 갈수록 겨울나기가 여의치 않다. 이것에 시달리다보니 봄가을의 부드러운 산들바람 외에는 모든 바람이 다 싫을 지경이다.
몇 년 전 겨울을 피해 서울에 있는 창작촌으로 간 적이 있다. 이상해하실 것이다. 아니 그 섬은 남쪽 아닌가? 서울보다 훨씬 따뜻할 텐데…. 맞는 말씀이다. 문제는 바람이다. 이곳은 웬만하면 영하권으로 떨어지지 않아 바람만 불지 않으면 여느 초봄 날씨가 된다. 그렇지만 이 계절풍만 불어오면 확 바뀐다. 춥고 삭막하고 괴로워진다. 그래서 육지에서 시집온 여자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시기도 겨울이다.
“소주를 마십니다, 소주를 마십니다”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한 여인네가 말했다.

“겨울이 되면 자꾸 육지 나가는 여객선이 쳐다봐져요.”

그녀는 내륙 출신이다. 이곳 남자와 결혼해 섬으로 들어온 지 한참이다. 이 바람은 이렇게 오래된 사랑마저 흔들어버린다.

그때 서울에서 겨울을 나며 낯선 체험을 했다. 이를테면 영하 10℃라 사람들은 추워하는데 나는 괜찮았다. 그런데 온도가 그다지 낮지 않은 날, 나 혼자 추워 벌벌 떨었다. 몇 번 그러고 나서야 유난히 추위에 힘들어하는 날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북서풍이 불었던 것이다. 섬에서 오래 살다보니 바람에 민감해진 몸이 되어버린 것.

가로등 불빛만 아르르 떨고 있는 황량한 골목. 그 골목을 파고들어 이곳에 있는 비닐봉지를 저곳으로 밀고 가는 바람, 차갑기 그지없는 바람들. 그러면 나는 목도리로 머리를 칭칭 감는 것도 모자라 한 줌의 영혼마저 저 깊숙한 곳에 쑤셔넣고 그저 그 길을 걸어가는, 단순한 생물체가 되어버린다. 섬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바람에 대한 촉만 커져버린다. 더듬이가 있다면 오로지 바람을 읽어내는 데만 쓰인다고 할까.

는 그나마 낫다. 어딘가에, 따스한 수프를 끓이고 있는, 마음씨 착한 사람의 집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다. 바닷가 내 거처는 늘 차갑게 식어 있다. 내가 들어가면 집이 되레 내 체온을 탐하고 든다.

그러면 전기장판을 켜고 (바닥에 전기패널이 깔려 있는데 전기세가 많이 나와 켤 엄두도 못 낸다) 소주를 마신다. 일전에 낸 책 는 항해와 바다와 술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중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잠깐 인용해보면 이렇다(어선이 배경이다).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로운 항해, 고단한 작업, 좁아터진 선실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 한마디로 소주라는 소리다. 이곳 겨울 바다의 섬도 그렇다. 그저 술이다.

남자는 모르고 여자는 안다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파도가 하얗게 솟구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손발이 얼어갑니다. 소주 마십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나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뭐 이런 식이다. 마치 아직도 어선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람에 들창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병을 꺼낸다.

얼른 몇 잔 마셔 외롭고 추운 몸을 덜 춥고 덜 외로운 에틸알코올의 세계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조금은 비장하고 우울한 미학이다. 그러고 나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혼자서 말한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겨울 바다는 존재에 대해 끙끙 앓는 시공간이다. 그거 외에는 제기랄, 다른 건 없다.

이런 식으로 술 덕을 많이 봤다. 이게 없었다면 적막이 훨씬 더 크고 깊어질 테니까. 술은 거기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값싼 방식이기도 하다. 참 오래도 마셨다. 살면서 가장 성실하게 해온 행위다. 그러다보니 몸도 상했다. 예전에는 독주를 좋아했다. 그러나 양주나 안동소주 같은 독주는 비싸다. 가난한 술꾼이 그런 술을 마실 확률은 극히 낮다. 그래서 오랫동안 가까이했던 독주가 ‘캡× 큐’이다. 거 있잖은가, 애꾸눈 선장 캐릭터가 나왔던 럼주. 기타 제재주에 속했던.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러 해 전 어떤 읍 골목을 지날 때 낡은 가게의 높은 선반, 간장과 세제가 놓여 있는 곳에서 어떤 병 하나를 문득 발견했다. 아랫부분이 둥글넓적하고 주둥이는 뾰족한 캡 거시기 큐, 그 술이었다. 그 종류 중에서도 가장 큰 것. 인기척을 내자 주인 영감님이 꾸물꾸물 걸어 나와 뭘 찾느냐고 물었다.

“저거 주세요.”

그는 내가 가리키는 것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단 한 병 있는 그것을 내렸다. 먼지가 잔뜩 묻은 걸로 봐서 그 자리에서 최소 10년은 지났으리라. 이걸 달라는 말이여? 그는 그게 그곳에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얼마냐고 물었다. 영감님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남자들이 으레 하는 방법을 썼다.

“어이, 이리 좀 나와봐.”

뒤이어 할머니가 남편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나왔다.

“이거 얼마여?”

이럴 땐 여자들의 판단과 결단이 빠르다. 아주 짧은 순간 멈칫하던 그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만원.”

그 조용한 긴장감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나는 웃으며 만원짜리를 꺼냈다. (내 기억에 그 술은 육천원 정도였다. 그러나 그게 문젠가. 세월의 가치가 있는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 주인 입장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제품을 내놓을 수 없는 일. 할머니는 주변에 떨어져 있던 신문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닦이지 않자 당황하며 방에서 마른걸레를 꺼내와 재차 문질렀는데 안타깝게 그것으로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어쭈,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물을 묻혀서 박박 닦아냈다. 비로소 술병은 유리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 모습을 그럭저럭 회복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내가 계속 웃자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술도 이 정도 오래되면 약으로 쓰니께.”

(이틀 뒤 마개를 따고 몇 모금 마셨는데 옛 맛도 아니 나는데다 약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술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밤마다 내내 마실 수는 없다. 종종 텔레비전도 켠다. 드라마나 시끄러운 예능은 물론 영화도 그다지 즐기지 않으니 내가 주로 켜는 채널은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둑(대한민국은 자유국가이다. 여러 소주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고 TV 채널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니까. 가련하게도 그리고 멍청하게도)이다.

혼자나 단둘이 사는 노인들이 늘 텔레비전을 켜놓고, 심지어 잠이 들어도 끄지 않는 이유는 적막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적당히 말을 걸어와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난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바닷가에서 혼자 오랫동안 살다보니 그런 모습이 나온다.

의외의 사실은 내가 바둑을 전혀 둘지 모른다는 것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 채널을 켜놓는 이유는 두 사람이 경기를 하는 중인데도 조용한 게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인플레이 상태인데도 전 선수가 정지 상태인 때가 있으니까. 그 조용한 긴장감 말이다.

최근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붙었다. 이세돌이 완승하면 사람들이 바둑으로 몰릴 것이고 지면 인공지능 쪽으로 몰릴 것으로 나는 예감했다. 1 대 4. 패배. 디지털에게 아날로그가 자꾸 파괴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고 쇠락해가던 바둑학원 원장들이 반짝 희망을 가졌다가 시르죽어가는 모습도 그려졌다. 곧바로 2025년까지 인공지능 시장이 2천조원이 될 거라는 뉴스가 나왔다. 대략 800만 명 정도가 직업을 잃은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하지만 이세돌의 노력과 집중력,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인 것은 다행이었다. 어쨌든 ‘기계의 능력’과 함께 ‘인간의 멋과 맛’도 부각되었으니까. 최후의 방어는 한 셈이랄까. 그러니 바둑학원이 곧바로 망할 것 같지는 않다. 해설을 하던 여자 프로기사도 이렇게 말했다.

“바둑을 하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데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보다는 다른 것에 이유가 있다. 바둑은 답이 없는데 거기에 비해 단어 외우는 게 너무 쉽기 때문이다.”

갑자기 떠오른 걱정 하나

하지만 학습이 강화된 알파고들이 나와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모조리 깨버릴 때가 올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보였다. 그러면 엄마들은 바둑학원에서 아이를 빼내와 인공지능 관련 학원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마치 새로 나온 고강도 탄소 소재 낚싯대로 대물 참돔을 낚았는데 사람들이 참돔은 잊어버리고 낚싯대의 새로운 소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처럼.

아무튼 나는 휘몰아치는 북서풍 소리를 들으며, 소주를 마시며, 시인 백석의 시구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를 읊조리며 그 어떤 인공지능이 나오더라도 이 쓸쓸함의 미학만큼은 사람처럼 하지 못할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걱정 하나.

훗날 인공지능이 이곳 면장으로 부임하여 나에게 ‘이따위 짓은 아무 효능이 없기에 앞으로 금지한다’ 하면 어떡하지?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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