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벤치의 나이테

벤치를 집 삼아 살던 시절 만난 사건, 사람… 세상 모든 벤치가 가진 제각각의 풍경과 인상
등록 2016-01-14 18:46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세상에 의자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미덕이다. 직립보행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서 있는 것보다 앉는 것을 원하고 그것보다는 눕는 것을 편안해하니(그래서 그런지 삶의 마무리도 눕는 자세이다) 직립이 좋아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공연히 서서 다닌 탓에 치질과 추간판탈출증, 즉 디스크를 달고 산다. 네발짐승은 이 두 가지 질병이 없단다. 그렇다고 기어서 회사와 학교, 시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서야 한다. 그럴 때마다 새삼 느낀다. 의자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버스나 기차에 입석으로 탔을 때를 떠올려보시라), 맨 처음 의자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궁금증까지.

누가, 어떤 자세로?

그래서 나온 시(詩)일 것이다. 이정록 시인의 ‘의자’ 중 일부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이여

의자라는 단순한 사물이 이렇게 인생살이를 담뿍 담아낼 수 있는 상관물이란 것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힘든 사람 앉으라고 내어준 의자는 감동스럽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특히 길을 걷다가 만나는 벤치는 더욱 그러하다. 은행잎 휘날리는 가을 오후 공원 벤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반대로, 그 공원 어디에도 벤치가 없다면 얼마나 황량한가).

그리고 그 벤치는 누가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가에 의해 각각 독립된 풍경으로 변하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한동안 바라보게 만든다. 지팡이를 짚은 노신사에게서는 성체처럼 높이 다져진 깊은 연륜을(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하더라도), 보따리 든 할머니에게서는 수평선처럼 낮게 가라앉은 시간의 중첩을(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 하더라도), 중년의 남성에게서는 청춘의 낭만을 되돌아보는 고독을(경마장에서 돈을 다 날렸다 하더라도), 중년 여성에게서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나선 용감한 외출을(11개월 단기 계약이 끝나 또 다른 비정규직 자리를 찾아헤매는 중이라 하더라도), 젊은 남자에게서는 이제 막 본격적인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는 의연한 순간을(입사 면접시험에서 일곱 번째 떨어졌다 하더라도), 젊은 여자에게서는 어제 들었던 인문학 강좌의 깊은 울림을 되새기는 순간을(지난밤 회식 자리에서 직장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하더라도), 십 대 소년에게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담배 피우다 걸려 학교를 땡땡이쳤다 하더라도), 십 대 소녀에게서는 곧 찾아올 사랑에 대해 꿈꾸는 모습을(성적 비관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중이라 하더라도), 심지어 어린 꼬마에게서는 마법의 세계와 맞닥뜨린 동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을(엄마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보게 된다.

당장, 거문도에도 내가 좋아하는 벤치가 있다. 집에서 목너머(지명이다)로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야트막한 고갯마루에 자리하고 있는 벤치 두 개가 그곳이다. 산에서 가장 좋은 명당은 나무꾼들이 앉아 쉬는 곳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맞다면 그곳은 최고의 명당이다.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는 앉게 되니까. 그럴 만도 한 게, 오르막 끝에 있는데다 바다 먼 곳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인도인 안놀섬과 반놀섬, 그리고 소삼부도와 대삼부도가 차례대로 줄이어 있는데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백도도 뚜렷하게 보인다. 나는 그중 오랜 쪽 벤치에 주로 앉아 있곤 한다.

바다의 표정이 보이는 벤치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바다는 그날 어떤 바람이 부느냐에 따라 표정이 변한다. 동풍은 파도가 높아 바다를 거친 세계로 만들어버린다. 습기를 머금은 남풍은 묵직한 너울을 몰고 온다. 여차하면 비도 온다. 서풍은 얌전함의 대명사이다. 아직 파도가 높이 치고 있지만 동풍에서 서풍으로 바뀐다면 곧 잔잔해진다는 신호이다. 북풍도 서풍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자주 불지는 않는다. 대신 요즘 같은 철에는 북서풍이 자주 분다. 여름 동안 온도가 높아진 유라시아 대륙에서 식어버린 태평양으로 부는 계절풍이다(10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불어온다. 최근 중국의 미세먼지를 싣고 오는 게 이것이다). 이 바람은 날카롭고 냉정하다. 그 때문에 바다는 겨울 내내 하얗게 변하며 을씨년스러워진다. 이렇게 모든 바람은 아이덴티티가 분명하다. 그날 어떤 바람이 부는가에 의해 낚시할 대상 어종과 장소가 정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벤치에서는 그런 바다의 표정이 잘 보인다. 바다의 기분이 보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도 그때 부는 바람의 방향대로 흘러간다. 바다의 일 년이 표정을 바꾸며 흘러가는 것을 그곳에서 확인한다. 단순한 나무 몇 개 엮어놓은 것이지만 벤치가 없었다면 무심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것 외에도 벤치에 대해서 나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아예 벤치를 집으로 삼아 지낸 적도 있었으니까. 이십 대 중반, 87년 유월항쟁이 끝났을 때였다. 이 정도면 됐다, 그만두자. 뒤늦게 들어가 일 년 반 다니던 지방 대학을 때려치우고 나는 떠돌았다. 살다보면 그럴 때 있다. 일도 하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그냥 자신을 방기해놓고 싶을 때 말이다. 그 전까지 방학이면 공사 현장을 찾아다녔는데 그나마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그럴 의욕도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걸었다. 지방도와 국도를 따라 걸었고 어떤 때는 기찻길도 따라 걸었다. 한 무리의 나이 든 사내들이 기차선 보수 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나를 건드렸다. 기찻길을 걷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 당장 나가라는 것. 그때나 그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누구라도 고압적인 자세로 사람을 윽박지르면 발끈한다. 이른바 ‘완장’에 대한 거부감이 발동하는 것이다.

이건 길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에게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당신 것부터 보자고 내가 대꾸했다. 이거 말로는 안 되겠네, 당장 경찰서에 신고해야겠네, 그가 말했다. 도대체 기찻길을 걷는 것만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나는 따졌다. 그는 끝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정든 벤치를 버렸던 이유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내 가방을 봐?”

“수상하니까. 간첩인지도 모르잖어?”

“간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진짜 간첩이면 이 가방 안에 총하고 수류탄이 들어 있어. 꺼내는 순간 당신은 죽어.”

실랑이가 멱살잡이까지 가자 다른 사람들이 뜯어말렸고 나는 내처 기찻길을 걸어갔다. 통일호와 무궁화호가 한 번씩 옷깃을 사정없이 펄럭이며 지나갔다.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소주에 생라면을 씹어 먹고 벤치에서 잤다. 낮에도 벤치에서 쉬었다. 세상 모든 벤치마다 풍경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모든 벤치가 자신만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새벽이면 추워서 몸이 오그라졌다. 그러면 다음 벤치를 찾아 걸었고 그러다 해가 떴다. 주머니 속 돈은 점점 더 줄어들어갔고 신발 밑창은 낡아갔다. 쓸쓸함이 지나치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심재영과 젊은 연인들’의 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꼭 그럴 것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가다보면 어느새 그 벤치 그 벤치, 귀에 익은 그 목소리 들려올 것만 같아, 나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다 커다란 도시에 도착을 했고 이번에는 공원으로 찾아들어갔다. 벤치 많기로는 공원이 최고이다. 그런데 밤이 되자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대신 다른 방문객들이 있었다. 상태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용직 행색의 중년 남자들이 찾아온 것이다. 먼저 한 남자가 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런 곳에서 자려고 하느냐, 집이 없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은 시간이 좀 지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라면에 소주를 주겠다. 난 노숙하는 사람에 대한 단순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프롤레타리아 게이’라고 불렀던 동성애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체성과 선택에 대해서는 존중하지만 그 성향이 없던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 남자는 끈질겨서 한참이나 나를 설득하다가 돌아섰다. 그러자 그때까지 나무 뒤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또 다가와서 잠을 재워주겠다, 라면과 소주를 주겠다, 제안해왔다.

가만히 보니 나무 뒤마다 남자 한 명씩 서 있었다. 마치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들에게는 내가 ‘뉴 페이스’였던 것이다. 그 덕에, 내 잠자리는 이 벤치 하나로 충분하기 때문에 귀하들을 따라갈 의사가 전혀 없노라고 거의 대중 연설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별로 먹히지 않아서 몇 시간을 시달려야 했다. 그중 한 명과 성정체성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까지 벌이게 되었고 그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더 깊어졌지만 그렇다고 내 정체성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졌다. 따라갔다는 소리가 아니고 몇 시간 동안 정들었던 벤치를 버리고 끝내 이사를 감행한 것이다. 역(驛) 벤치로.

풍경이 한줄 한줄 새겨진

내가 앉거나 잠들었던 그 많은 벤치들은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있을까. 이 생각은, 목너머 가는 고갯마루의 벤치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을까, 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낯선 섬의 벤치에 앉아 웃기도 하고 한숨 내쉬기도 하고 망연자실 침묵하기도 하고 더러 울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어쩌면 그곳엔 그동안 거쳐간 이들의 이력과 사연이 한줄 한줄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벤치란 그런 장소니까.

한창훈 소설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