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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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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 틀어놓고 꽃상여가 나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산다이… 서랍 속에 묻힐 뻔했던 영화 <순정>의 뒷이야기
등록 2016-05-01 04:03 수정 2020-05-03 04:28

몇 호 전 원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제1103호 참조) 말미에 나는 ‘저 먼 기억 속의 소녀’라는 소제목을 달고 우리 마을에서 살았던 한 소녀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연을 썼다. 그것을 읽은 몇몇 분이 좀 자세히 말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해도 될까, 고민이 들었지만 이제 그 영화도 내렸고 무엇보다 지극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와 친구들의 우정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기에 그 뒷이야기를 할까 한다. 그러니 그때 원고와 약간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용서하시길.
더벅머리 소년들이 업고 다녔던 누나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영화 제목은 이었다. 흥행에 실패하였으니 안 보신 분이 훨씬 더 많겠지만 아마도 제목은 알고 계실 것이다. 여기저기 홍보 영상이 많이 나왔으니까. 아주 유명한, 두 어린 친구가 주인공으로도 나왔으니까.

먼저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가자. 그 소녀는 나보다 삼사 년 정도 선배였다. 두 다리 모두 소아마비에 걸려서 잘 걷지를 못했다. 사춘기가 가까워지자 목발을 짚지 않고 천천히 걸어다녔다. 길에서 누군가 만나면 인사한 다음 돌담을 짚은 채 서 있기만 했다.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은 나처럼 어린 후배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어디 가?”

길에서 그녀와 마주친 내가 물었다.

“갱번(바닷가)에. 넌 어디 갔다 와?”

“갱번에.”

안녕, 인사를 하고 걸어가다가 돌아보면 그때까지 돌담을 짚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불편한 걸음걸이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 때의 소녀였으니까.

말했던 대로, 그녀는 얼굴이 예뻤고 마음씨도 고왔다. 인내와 침묵만 있었지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못된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무언가를 바라보는 존재였다. 하늘을, 바다를, 햇살을, 비를, 노을을, 깜깜한 밤의 허공을 바라봐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소녀는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밤마다 FM 라디오 음악프로를 들었다. 카세트로 테이프를 듣기도 했지만 자주 그러지는 못했다. 건전지를 넣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 마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는 내가 스무 살 되던 해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석유 등잔불을 켰다. 그 등잔을 호야라고 불렀다.) 그래서 아껴야 했다. 돈이 없었으니까.

대신 친구들이 있었다. 특히 더벅머리 섬 소년들. 우리 마을은 거문도 내 동도(東島) 중에서 죽촌리였다. 동도에는 유촌리라는 마을이 하나 더 있는데 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보통 웃길이라고 불렀던, 산속 소롯길로 학교엘 다녔다. 소녀와 친구들도 그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교대로 그녀를 업고 다녔다는 것. 육 년 동안. 여자친구들은 가방을 들고. 중학교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도(西島) 덕촌리에 있다. 지난해에 다리가 완공되었으니 대대로 동도에서 서도를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학생들은 통학선을 탔다.

혼자 남은 그녀는 왜 떠났을까

중학생이 된 그들은 소녀를 업고 선착장까지 내려가서 통학선에 올랐고 배가 덕촌리 선착장에 도착하면 다시 업고 산 중턱에 있는 중학교까지 올라갔다. 삼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업는 것을 힘들어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가 무심코 등대(거문도 등대는 중학교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있다)의 수선화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숙덕숙덕한 다음 그중 한 친구 집 배를 몰래 빼와 싣고 가기도 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중학생 정도면 배를 몰 줄 알았다. 물론 나중에 혼이 나기도 했다.

그 친구들 등짝에는 지금도 공동으로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우정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싶어 했다면 아마도 훔쳐보려고 계획까지는 짰을 것이다. 중학교를 마치자 친구들은 섬을 떠났다(우리 섬에는 고등학교가 없다). 일반고등학교나 산업체부설학교, 아니면 그냥 공장 등지로. 그녀는 혼자 남았다. 홀로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바다와 노을과 밤의 허공을 더 자주 바라보며 지냈다. 친구들은 음악 테이프를 동봉한 편지를 보내왔고 그녀는 답장을 썼다. 방학이 되어서야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비가 쏟아졌던 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채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죽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좋아했다는 소문도 떠돌았고 갯바위에서 미끄러졌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본 사람이 없었기에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몰랐다.

장례 문제로 마을 어른들과의 마찰은 지난 원고에 잠깐 썼으니 생략한다. 아무튼 열일곱, 열여덟 어린 친구들은 스스로 상주가 되어 마을회관에 분향소를 차렸고 장례를 치러냈다. 그리고 출상하던 날, 상여소리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고민하다가 차라리 그녀가 좋아했던 음악을 틀어주자는 의견에 따라 그렇게 했다. 커다란 카세트를 광목으로 동여맨, 팝송 틀어놓은 꽃상여는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산다이였다.

“이거 영화 안 돼”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미 여수로 전학을 간 다음이었던 나는 친구를 통해 그 소식과 과정을 전해들었다. 소녀의 슬픔과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은 그렇게 해서 내 마음속 깊이 똬리를 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된 다음 어느 연작 장편소설 중 한 꼭지로 그 장면을 썼는데 두고두고 아쉬웠다. 이야기를 하다 만 기분이었고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완성시켜달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배경이고 이제는 영화 뒷이야기이다. 십 년 전 다시 섬으로 들어온 나는 그것을 완성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영상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는 선배를 찾아가 만났다. 대략의 스토리를 들은 그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절대 영화 안 돼.” 그의 답이었다. 그는 고기에 술을 살 테니 그거나 먹고 돌아가라고 하면서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먹기는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서 시나리오 샘플 몇 개를 얻어 돌아왔고 두어 편 읽어본 다음 무조건 쓰기 시작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대로. 한 번도 안 써본 시나리오가 일단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알고 지내는 영화계 쪽 후배에게 그것을 보냈다. 시나리오라는 것을 하나 썼으니 한번 읽어보라는 것. 그게 충무로에서 이 손, 저 손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팔 년 동안.

몇몇 영화사에서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공통된 의견은 하나였다. 영화로 만들기 쉽지 않겠다는 것. 주인공이 십 대면 투자받기가 정말 어렵고 특히 팝송이 많이 들어갔던데 음원 저작료가 엄청나다는 것. 감독으로 이름 떨치고 있던 모 선배는 시나리오에 들어간 노래 음원 값을 계산해봤는데 10억원 정도더라고 전해왔다. 보통의 팝송 하나 쓰는 데 2천만원가량 든다고 해서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은 훨씬 더 비싸졌단다(나는 요즘 글 쓰겠다는 애들에게 작곡을 공부하라고 권한다).

연락해온 영화사들은 그런 난관은 있으니 가계약을 하자고 전해왔다. 이를테면 ‘홀드’해놓고 싶어 했던 것. 나는 거절했다. 이 사연과 나는 공동운명이고 싶다, 모든 글은 스스로의 팔자가 있으니 그냥 두겠다는 게 이유였다.

하염없이 시간이 갔다. 그리고 지난해 초. 시나리오를 읽은 J영화사 대표가 영화로 만들어보겠다고 연락해왔다. 유명한 영화를 여러 편 제작했다는 그가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편드는 것 같아 약간은 저어되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중요한 문제이니까. 블록버스터나 자극적인 영화의 문제점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지적한 문제는 이거였다. 다들 그런 영화만 만들어내고, 또 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빠진다’는 것. 창작자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가치와 의미보다는 투자자의 판단에 의해서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실이니까.

같은 맥락으로, 영화 이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마음속에 순정이 없어져서 그래.” 영화 이 사람들 마음속 순수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최소한, 자극적이고 파괴적이고 엽기적인 소재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좀 덜 나빴더라면

영화사 대표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1억원을 기부하고,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수익금의 절반도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했다는 것은 계약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됐다. 그 사람의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소녀 이야기는 그저 종이에 인쇄된 활자 상태로 서랍 속에서 탈색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개봉된 다음 나는 한동안 서울에서 지내며 혼자 영화관을 전전했다. 관객 수가 줄어들자 상영관도 급전직하로 줄어들었다. 홍대로, 일산으로, 건국대 앞으로 찾아가며 영화를 보았고, 울었고, 술을 마셨다. 영화 자체가 워낙 눈물샘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각색된 탓도 있지만 그 아름답고 착했던 소녀의 비극과 눈물겨운 그 친구들의 우정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문예창작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이나 수업을 할 때 이 이야기를 해왔다. “책상 앞에서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상상한다. 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 현실을 찾아서 문을 열고 나가라….”

의 사연도(각색에 의해 이야기가 조금 바뀌었지만) 내 상상의 결과물이라면 쓸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내가 그 이야기를 겁도 없이 시나리오로 썼던 것은 실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낚시를 간 장소가 동도 죽촌 마을이 마주 보이는 곳이었다. 오래전 그날처럼, 한 소녀가 돌담을 짚으며 서 있고, 친구들이 그녀를 찾아와 업었고,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밥 딜런과 비지스의 노래를 틀어놓고 꽃상여가 나가고 있었다. 내 눈에서는 여전히.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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