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내 배, 동성호

사람과 바다가 정면으로 만나려면 역시 내 배가 있어야 했다
등록 2016-01-01 20:17 수정 2020-05-03 04:28

내 기억 속 최초의 배는 외삼촌의 어선이었다. 통통배라고 불렀던, 이사이클 행정의 소구기관 배였다. 외삼촌은 그것으로 어장을 다녔는데 내가 맨 처음 그 배를 얻어 타고 따라간 게 일곱 살 때였다. 보통은 저녁에 그물을 내리고 다음날 새벽에 걷는 게 순서이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 청년들과 심심하게 앉아 있다가 즉흥적으로 ‘그물 한번 놓으러 가자’ 이랬던 것 같다. 대낮이었고 나도 덩달아 따라갔으니까. 도착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해수욕장이었다. 길게 그물을 내려놓고 뒤로 빠진 배에서 사람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손아귀에 쥘 정도 크기의 조약돌이었는데 이런 것을 빵돌이라고 한다. 물고기를 놀래어서 그물 있는 쪽으로 모는 역할을 한다. 나도 던졌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잡아올리는 방법인 것이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어떤 고기가 가장 먼저 올라올 것 같니?” 나는 모래망치(보리멸)라고 대답했다가 조금 뒤 상사리(어린 참돔)라고 고쳤다. 공연히 고민되었던 것인데 결국 틀렸다. 숭어가 가장 먼저 올라왔으니까. 그들은 그날 광주리 가득 생선을 잡아와서 굽고 회를 떠 왁자하니 술을 마셨다. 남은 것은 사람 수대로 나누고.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살려면 배가 한 척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
살려면 배가 한 척 있어야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배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게 그때부터였다. 배마다 엔진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고 누구네 배가 가장 빠른가를 두고 친구와 사카린 내기도 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마을 앞에 묶여 있는 어선마다 올라가서 구석구석 살펴보기도 했다. 식수통을 열어보고 선실도 들여다봤다. 어떤 배든 선실에는 같은 게 꼭 있었다. 군용모포와 화투짝.

배를 시동 걸면 연통에서 도넛 모양의 동그라미가 회전을 하면서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그게 신기하여 한번은 연통 속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하기만 해서 더욱 바짝 얼굴을 가져다댔지만 끝내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날 오후 나를 바라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얼굴에 연통의 검댕이 동그랗게 찍힌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문도에서 여수 나갈 때 맨 처음 탔던 여객선은 삼산호였다. 일본 고등어 운반선을 나포하여 개조한 것이랬다. 한일협정 맺기 전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거문도 어장이 좋아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해방 뒤에도 그렇게 어장 하러 온 배들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선실은 다다미가 깔린 방이었다. 여수까지 8시간 걸렸다. 삼산호 이후 지금까지 내가 탔던 이 노선의 배는 한두 척이 아니다. 신라호, 덕일호, 신영고속훼리호, 한일3호, 타고마, 데모크라시, 페레스트로이카, 페가서스, 가고오고, 오가고, 줄리아아쿠아…. 그것을 탈 때마다 역시 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가 없으면 섬은 완전 다른 나라이니까.

이십 대 중반에 탔던 오징어잡이 배도 있었다. 구아다리(계절선원)로 탔는데 식비와 채비값 제외하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여수로 내려와 이런저런 양식장 작업선을 탔다. 여수 앞바다 마을과 양식장 있는 곳은 죄다 찾아다녔다.

여기서 잠깐. 예전에는 배에 여자 태우는 게 금기였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동양은 처음부터 여성에게 이런저런 금기를 많이들 붙여놨기 때문이고 서양에서는 배에 여성관사가 붙는데(선박의 속성을 여성이라고 본 것이다) 거기에 여자가 또 타면 여성성 과잉으로 탈이 난다고 봤기 때문이다, 가 일반적인 정설이다. 선원들의 실수나 판단착오의 핑계를 여자에게 돌린 혐의가 짙은데 거기에 덧붙여 내 추측이 하나 더 있다.

배 없는 서러움이 사무쳤다

일반 어선은 화장실이 없다. 항해 중에 사내들은 오줌을 바다에 눈다. 그것은 그렇다 친다. 똥까지 그렇다는 게 문제이다. 격벽에 올라앉아 고정용 말뚝을 잡고 바다를 향해 엉덩이를 까는 게 처리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여주기 민망하고, 여자들 입장에서는 일처리 하기 더욱 거시기해서 안 태웠던 것으로 나는 본다. 아니면 말고. 아무튼 그렇게 돈벌이를 하면서 역시 배가 있어야 하는구나, 또 생각했다.

1999년부터 다음해까지 이곳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도 외삼촌은 1톤도 채 되지 않은 작은 어선을 가지고 있었다. 완도 어디쯤에서 거문도로 삼치 낚으러 온 늙은 부부가 있었다. 방 하나 얻어놓고 먹고 자면서 어장을 다녔는데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나보다. 싸움 끝에 화가 머리꼭지 오른 영감님이 돌연 배를 전속력으로 몰아 마을 앞 물항장에 일부러 받아버렸다. 배는 가라앉고 그는 그 상태로 선박수리소 주인에게 싸게 팔고 가버렸다. 그가 건져내서 고친 것을 외삼촌이 산 것이다.

나와 삼촌은 날마다 그 배를 타고 그물을 놓고 도미와 삼치를 낚으러 다녔다. 푸지기는 역시 그물이다. 깜깜한 새벽에 나가 서른세 칸 그물 올리고 생선과 소라, 해삼, 문어 따위를 다 추려내면 정오였다. 그걸 날마다 해서 허리가 끝없이 아팠다. 그래도 수확물을 보면 흐뭇했다. 역시 배가 있어야 했다. 내 배만 없었다.

그리고 십 년 전 고향 섬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로 가까운 방파제와 갯바위로 낚시를 다녔는데 간혹 가두리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가두리 주인에게 부탁하여 그의 배를 얻어 타고 가야 했다. 그가 마음이 바뀌거나 일정이 비틀어져서 두 시간 동안 선착장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갔다 하더라도 그가 퇴근하면 꼼짝 못하고 같이 돌아와야 했다. 배 없는 서러움이 사무쳤다.

날이 좋아 멀리 일급 포인트 갯바위에 가고 싶으면 낚싯배 하는 선배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때도 출발과 돌아오는 것 모두 그 배 일정에 맞춰야 했다. 아무리 잘 물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다른 손님들 여객선 타는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 너무 안 잡혀 돌아가고 싶어도 데리러 올 때까지 그냥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역시 내 배가 있어야 했다.

비행기는 이동, 배는 여행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노 젓는 거룻배를 여기서는 뗌마라고 한다. 그중 작은 것은 오마리라고도 한다. 그런 거라도 한 척 있으면 해서 찾아다녔는데 이제는 그런 배 구경하기도 어렵다. 하다못해 육지 호수에서 돈 내고 타는, 발로 페달을 돌리는 오리 배라도 하나 구해올까 궁리한 적도 있었다. 컨테이너선을 타고 두바이와 유럽 갔을 때, 그리고 아라온호 타고 북극해 갔을 때도 역시 배의 존재감은 분명했다. 남중국해와 인도양, 아라비아해, 지중해, 대서양, 그리고 베링해와 북극해를 바라보며 배가 갖는 최고의 매력을 재확인했으니까. 이 이야기는 지난 3회에서 잠깐 했으니 그만한다.

“현대 첨단 기술의 집약이 바로 선박입니다.”

어느 항해사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첨단 운운하면 열차 운전사는 당연히 자기부상열차라고 하고 파일럿은 비행기라고 하고 카레이서는 스포츠카라고 하고 우주비행사는 우주선이라고 할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배가 없다면 불가능한 여행이었고 그것은 비행기 타는 것과 근본이 달랐다. 비행기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빠른 이동 자체이니까. 과정 생략의 극단이니까. 반대가 배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그 과정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일상생활도 육지와 똑같이 해야 한다(그래서 우주비행기가 아니라 우주선(船)이다). 특히 데드슬로우(dead slow)로 나아가는 컨테이너선 윙 브리지에서 보았던 홍콩의 야경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항구의 야경은 배에서 봐야 진짜이다.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배를 통째로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서나, 언제나 공통점은 하나. 내 배가 아니라는 것. 이렇게 많은 배들 중에 내 것은 없다는 것. 그게 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질러버린’ 게 동성호를 산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스스로를 위해 투자를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웬만한 불편은 그냥 견디고 살았다. 그런 내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한 명 끌어들여서. 저번에 말한, 슈퍼 하고 있는 사진작가 선배이다. 둘이서 절반씩 내서 중고로 샀는데 평생 스스로를 위해 가장 큰 돈을 썼다. 사람들은 배 값을 정말 궁금해한다. 그것은 끝에서.

한 사람이 바다와 일대일로 맞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얼까. 알몸으로 뛰어드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잘해봤자 해안에서 첨벙거리는 풍경밖에 안 된다. 홀로 내 배를 몰고 푸른 바다로 멀리 나가는 것. 일부러 속도를 죽이고 파도 따라 자연스럽게 떠밀리는 그 순간이 바다와 내가 정면으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보름달 뜬 밤바다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자신의 배를 가지고 싶은 이유이다.

속 한번 안 썩인 동성호

지난 사 년 동안 동성호를 타고 다이빙을 가고 전갱이와 장어, 참돔과 농어를 낚으러 다녔다. 갯것도 다녔다. 최근에는 불볼락 낚으러 다녀왔다. 살다보면 동식물이나 사물도 나와 맞는 궁합이 따로 있다. 동성호는 지금까지 속 한번 안 썩였다. 비록, 낚시하다가 해경단속에 걸려 벌금을 문 적은 있지만 그건 배 잘못이 아니었다. 무면허인데다 배 등록이 양식장 관리선이었으니까. 관리선 타고 낚시하면 불법이다. 법률 이전부터 대대로 이렇게 물고기 잡아왔던 자연의 법칙을 들먹이며 저항했지만(웃기게도 다음날 나는 여수에서 해양경찰 상대로 강연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풍랑 때문에 나가지 못해서 취소했다) 결국 물었다. 그 뒤 면허를 따고 배도 레저로 등록을 바꾸었다.

나는 지금도 동성호를 산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짓 두어 가지 중에 하나로 친다. 그래서 간혹 남 안 보이게 툭툭 두드리며 고맙다고 말하곤 한다. 큰 배와 조우하면 속도를 줄여 파도를 탄 다음 다시 출발해야 하는, 배 없는 서러움 대신 이젠 배 작은 서러움이 몰려오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도 동성호 타고 바다로 나간다.

아, 배 값은 일인당 칠백만원씩 냈다.

한창훈 소설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