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는 이것으로 하지만 사실은 저것을 말하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는 많다. JTBC 월·화 미니시리즈 는 ‘불륜’으로 홍보됐다. 마흔 살 여자와 스무 살 남자의 ‘불륜’, 시청자를 텔레비전 앞으로 일단 불러야 하니까 그렇다. 물론 거짓은 아니다. 엄연히 불륜이 있다. 음악대학을 운영하는 서한예술재단 오혜원(김희애) 실장은 천재적 재능을 가진 가난한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를 만나 치명적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정성주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만이 아니다. 농밀한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사랑밖엔 난 몰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둘러싼 인물들, 사랑을 부르는 조건이 중요하다. 스무 살 차이의 강렬한 불륜은 여주인공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염증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염증을 부르는 세계는, 당연히 부자의 세계다.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PD는 전작인 에서도 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시대 부자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김희애들’은 외부에서 이식된 존재다. 그들은 서민/중산층 출신으로 애초 여기에 속한 이들이 아니다. 가난한 방송작가 출신인 의 윤서래, 부자 친구에 ‘묻어서’ 유학을 가야 했던 예술고 출신 오혜원. 김희애가 연기한 역할들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팔자가 아니다. 손주를 국제학교에 보내고 싶은 시가와 남편에 의해 서울 대치동으로 이주를 강권당한 엄마였고, 오직 성공을 위해 부자 친구 시중을 평생 들며 살아온 “우아한 노비”다. 그들은 고군분투한다. 그 세계가 그곳에서 시작하지 않은 그들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으면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 계급의 유전이 두 세대를 넘어버려 계급의 사다리가 이제는 끊긴 한국 사회에 대한 냉정한 묘사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로 태어나 부자로 살다가 부자로 죽을 애들이 보지 못할 것을 본다. 이웃집 남자와 바람이 나든, 연하의 남자와 불륜에 빠지든, 와 은 우리 시대 부자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정성주 작가가 시청자에게 제출하는 보고서 양식의 항목은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그들은 물건을 던지고 사람을 해친다. 오혜원 이마에 붙은 반창고 하나로 그들은 간단히 손찌검이나 하는 것들이 된다. “30년 우정”의 친구는 ‘뻑하면’ 마작패를, 서류판을 던진다. “야, 오혜원!” 하면서 얼굴에 대고 마구 던진다. 그 폭력은 무죄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손찌검하는 서영우(김혜은)의 아버지가 예술재단의 실소유주요, 목격자들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폭력은 강자와 약자 사이를 넘어 모든 관계의 본질에 있다. 는 우아한 여자화장실의 은밀한 폭력으로 이 세계의 문을 열었다. 한성숙(심혜진)은 호스티스 출신인 자신의 과거를 들추는 서영우의 머리채를 잡아서 변기에 처박는다. 저래도 되나 싶게 한참을 박는다. 그런데 이들은 서류상 모녀다. 예술재단 이사장인 한성숙이 예술센터 대표인 서영우의 계모다. ‘자, 여러분 여기는 이런 세계예요’, 드라마는 선포했다. 여기에 겹치는 신이 있다. 에서 시누이가 ‘언니’(오빠의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다. 어쩌면 사소한 폭력인데 그 폭력의 효과는 매우 잔인하다.
에서 정보는 권력의 핵심이요, 폭력의 수단이다. 예술재단, 입시비리, 자리를 둘러싸고 끝없는 정보 전쟁이 벌어진다. 여기는 재단을,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를 눌러야 하는 세계다. 서한그룹 회장 서필원(김용건), 서영우, 한성숙 사이에서 오혜원은 “삼중 스파이”로 살아왔다. 그것은 건초염으로 피아니스트 인생을 잃은 그녀가 선택한 생존법이다. 비밀 장부를 만들고, 불법 도청을 하고, 감시 카메라를 돌리고…. 정보를 독점하고 약점을 캐내야 사는 세계에서 혜원은 내외부자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내부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니?” 소리를 듣는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위험하다. 그녀는 그렇게 “어디서나 주로 서 있고 때로는 구두를 신고 자는” 인생을 살아왔다. 억대 연봉을 지키려면 맞는 굴욕도 참아야 한다. 물론 “집이나 차나 심지어 가정부도 네 것인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이지만 말이다. “너 나랑 따로 구좌 트자”는 서 회장의 위험한 제안도 “해야죠”라는 다짐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파멸을 예감해도 거부하지 못하는 인생을 혜원은 산다. 엄마의 정보력이 곧 아이의 성적이 되는 대치동 전투 도 원리가 다르지 않았다.
회생이 불가능한 속물들의 퍼레이드‘작업’은 여자들이 한다. 정성주 작가가 묘사하는 세계에서 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여자다. 에서 어떻게든 자식을 국제학교에 보내려고 정보 전쟁을 벌이는 엄마도 여자였고, 에서 예술재단 꼭대기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는 이들도 여자다. 이런 이전투구의 주체는 여자다. 불륜의 주체도 여자다. 이것이 정성주식 페미니즘이다. 여자들은 전투하지만, 남자들은 심판한다. 때로 남성권력 검찰이 끼어들어 전투의 변수가 된다. 이런 위기와 곡절을 겪지만, 결국은 남편과 회장이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이 정성주가 ‘까발리는’ 가부장제다. 여자들을 이전투구로 내몰고, 남자들은 먼발치의 꼭대기에서 전투를 지켜본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의 명령을 거부하는 주체로 선다.
부자 남자들은 냄새나는 할아버지, 찌질한 남편이다. 의 남편들이 하는 말을 줄이면 “당신이 좀 해봐”. 욕망은 원대하나 능력은 치졸한 남편들은 끝없이 갈등한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아내를 잃으면 현재의 위치도 잃을까 두려운 혜원의 남편 강준형(박혁권) 교수가 그렇다. 교수나 기자, 허울은 좋지만 능력은 바닥인 이들은 정성주 작가가 에서부터 그려온 찌질한 남편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뒤에서 아버지의 아버지는 말한다. “아니, 그렇게밖에 못하냐.” 에서 법조인 출신의 시아버지가 그랬고, 의 서 회장이 그렇다. 아들에게 말하는 척하지만, 실은 며느리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결국 근본을 탓하며 며느리(혹은 자식 같은 혜원)를 내치는 이들은 자기보다 큰 권력에는 굽실굽실 전전긍긍하는 자들이다. 의 시아버지는 대형 로펌 대표인 사돈에게 비굴하다. 권력의 정점인 사돈어른은 ‘핏줄’을 지독히 따진다. 며느리가 낳은 손녀보다 아들이 두집 살림해서 낳은 손자가 그에겐 소중하다. 의 서 회장도 마찬가지다. 남들 앞에선 새로 들인 부인을 위하는 척하지만, 내심은 딸에게 가 있다. 그들은 회생이 불가능한 속물이다. 이렇게 산업화 세대의 성공한 남자들은 약자를 집어삼키며 살았고, 민주화 세대의 남자들은 아내마저 이용하고 무시하는 치졸한 어른이 되었다. 이것이 개발주의 시대에 대한 작가의 태도다.
심지어 이들은 점쟁이나 믿는 것들이다. 에선 무속인 백 선생이 백발백중의 투자 컨설턴트로 나온다. 혜원의 남편 서 교수는 선재가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란 점쟁이의 말이 귀에 맴돌아 아내와 선재의 관계를 알고도 참으려 애쓴다. 이런 치졸한 부자들 대척점에 건강한 서민의 세계가 있다. 두 개의 세계는 여주인공을 통해 연결된다. 혜원의 애인인 선재는 퀵서비스를, 서래의 동생은 반찬가게를 했다. 정성주 작가의 ‘밥 먹이는 일’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모택동 주석이 대문호 루쉰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교에 다녔고, 만인민이 평등하다 배웠고, 내가 내 주인이다 그렇게 배웠소.” 서 회장이 쫓아다니는 중국동포 아주머니가 독주를 앞에 놓고 혜원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 자신에게 “다시는 (회장을)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해달라”는 혜원의 얼굴에 아주머니는 물을 끼얹는다. 어떤 모욕도 참던 혜원이 가장 슬프게 보이는 순간이다. 자기 몸을 굴려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당한 굴욕이라 뼈아프다. 그 아주머니도 식당일을 했다. 와 에서 가난한 사람 누구도 자존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작업장에서 얻은 생생한 정보로 극의 흐름을 바꾼다. 에서 서래의 동생은 도우미 아주머니들을 통해 들은 정보로 언니를 돕는다. 선재의 여자친구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며 흘려들은 얘기를 통해 자신에게 닥친 불길한 현실을 예감한다.
종편 속 부르주아와의 밀회와 은 성숙한 여인이 낯선 세계에 던져진 미성숙한 남자/아이를 보호하는 이야기다. “더러운 건 내가 상대해. 그게 내 전공이거든.” 혜원이 선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말이다. 선생이 없는 아이는 아이가 없는 선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선생인 혜원이 선재와 만남을 통해 욕망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혜원은 희망을 욕망한다. 선재의 순수한 재능을 발견하고 지켜주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사하고 싶은 것이다. 도 따지고 보면, 대치동이라는 무한경쟁의 낯선 세계에 던져진 아들을 지켜주고 싶은 엄마의 고군분투였다. 지켜주고 싶은 존재가 아들이든 아들 같은 천재이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실패를 돌이킬 수 없다고 느끼는 인간은, 다음 세대의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다. 이것은 혜원과 서래에게 투영된 작가의 욕망이자 모성이다.
안판석의 치밀한 연출은 보는 사람을 몰입의 세계로 이끈다. 그의 연출을 통해 우리는 부자의 세계를 구경하고 그것에 압도당한다. 김희애의 물광 피부와 완벽한 라인에서 비롯된 이 세계는 우아한 미용실, 화려한 사무실 같은 공간으로 확장된다. 밀폐된 부르주아의 세계는 그렇게 우리 앞에 현현한다. 그들의 ‘독살스러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우아한 공간이 필요한 역설이 빚어진다. 이것은 다시 부자를 고발하는 드라마를 종편을 통해 봐야 하는 역설적 현실로 이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부르주아의 세계와 밀회한다. 이것이 정성주 극본, 안판석 연출의 ‘강남 부르주아 시리즈’의 역설이다. 여기서 강남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을 넘어선 이름이다.
도움말: 김민아 제4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김송은 씨네21북스 팀장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1008호 주요 기사• [표지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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