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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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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의 귀신 낫 이야기

풀과의 전쟁에 유용한 ‘귀신 낫’,
‘오래된 미래’를 대표하는 건강한 연장
등록 2013-08-14 17:21 수정 2020-05-03 04:27
‘귀신 낫’의 모양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강명구 교수가 모델로 직접 나섰다. 허리춤에는 숫돌을 꽂고 있다.강명구 제공

‘귀신 낫’의 모양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강명구 교수가 모델로 직접 나섰다. 허리춤에는 숫돌을 꽂고 있다.강명구 제공

글제만 딱 보면 아마도 십중팔구 독자들께서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제목인가라고 하실 것이다. 짧은 설명을 곁들인다. ‘나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축제지만 서양에서는 기괴한 가면과 사탕 장수들이(그리고 단것 먹고 이 닦으라고 칫솔과 치약 장수들이) 한몫 잡는 핼러윈이라고 하는 ‘귀신 데이’가 있다. 여기서 전통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분장이 긴 낫을 들고 있는 검은 옷의 저승사자다. 나는 바로 그 낫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풀과의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요즈음 예초기와 더불어 쓸 만한 녀석이 바로 이 귀신 낫이다. 비가 와도 너무 온다 싶게 지루한 장마철에 자칫 풀 깎는 시기를 놓치면 어느새 정강이까지 자라 있다. 비에 젖은 풀은 칭칭 감기는 속성 때문에 예초기로도 깎기 힘들다.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바로 귀신 낫이다.

본디 이름인 사이드(Scythe)라는 철자만 보고는 도저히 발음하기 어려운 이 귀신 낫은 한마디로 긴 자루에 커다란 낫을 달아 맨 서양 낫의 한 종류다. 자루에 달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서 선 자세로 허리의 회전 반동 원심력을 이용해 풀을 자른다. 호미건 낫이건 땅바닥에 달라붙는 자세로 일하는 우리네와 달리 주로 서서 일하는 습성이 밴 서양 사람들의 전통적 노하우가 집약된 연장이다. 서양에서는 주로 가축 먹이인 긴 풀을 잘라 건초를 만드는 데 쓰이는데 요즈음은 환경문제로 인해 ‘오래된 미래’를 대표하는 건강한 연장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예초기와 풀베기 시합을 벌이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숙련된 도사급 장인들은 효율성에서 기계를 능가한다.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소음도 없이 인간과 자연이 연장을 통해 하나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집안 식구들 지청구를 피해 몰래 미국 북쪽 산골마을 메인주에 있는 어느 오래된 전문 제조회사에 하나 주문해 쓰고 있는데 처음에는 좀 불편했으나 이제는 많이 숙달되었다. 써보니 나름대로 장단점이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이 연장은 좁은 공간이나 키 작은 잡초에는 취약하지만 넓은 면적의 키 큰 잡초 제거에는 탁월했다. 해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아마 보리나 밀을 수확할 때도 좋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좋은 점은 물기 있는 잡초 제거가 손쉬워 땡볕을 피해 이른 아침 시원한 시간대에 (그것도 소음이나 매연 없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다보면 저절로 알겠지만 풀을 자르면서 동시에 모을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든 장점이다. 자를 때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전진하며 한 바퀴 돌면 잘린 풀들이 가운데로 수북이 모여 나중에 말리거나 거두어 멀칭할 때 편리하다.

어느 정도 숙달되니 생각보다는 힘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40m 전진하면 호흡이 약간 거칠어진다. 이럴 때면 잠시 서서 허리춤에 꽂고 다니게 만든 숫돌 통에서 숫돌을 꺼내 날을 벼린 다음 주변 경치를 일별하고 다시 전진한다. 숙달되려면 연습이 필요하고 힘이 좀 든다는 사실 외에 돌이 많고 굴곡이 있는 땅이나 경사가 급한 곳은 아무래도 애로 사항이 많았다.

몇 해 전 귀신 낫을 주문하고 택배 배달 상자를 뜯으니 꼬부랑 손글씨로 이렇게 적힌 메모가 나왔다. “놀랍다. 한국에서도 주문하다니. 그런데 네가 두 번째다.” 어떤 호기심 많고 실험정신 강한 고수가 나보다 앞서 이 기기묘묘하게 생긴 서양 낫을 주문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연재 첫 회의 제목이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였다. 그 말이 맞기는 맞는가 싶다. 선배님! 혹시라도 이 글 보시면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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