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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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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남은 풍경 하나

군대 말년 2주 휴가 더 얻으려고 한 결혼식 그리고 신혼여행 간
경주에서 본 계림, 그리고 계림을 흉내낸 느티나무 숲
등록 2014-10-25 18:07 수정 2020-05-03 04:27
이제 몇 주만 지나면 느티나무 밭 낙엽 위에 만추의 멜랑콜리가 쌓이리라. 숲 사이에는 여름에 즐겨 사용한 해먹이 걸려 있다. 강명구 제공

이제 몇 주만 지나면 느티나무 밭 낙엽 위에 만추의 멜랑콜리가 쌓이리라. 숲 사이에는 여름에 즐겨 사용한 해먹이 걸려 있다. 강명구 제공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신랑이 하객들 앞에서 인사를 하는데 덜컥 가발이 벗겨지고 까까머리 군인 머리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군대 말년에 2주 휴가를 더 얻기 위해 벌인 나의 결혼식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난생처음 써보는 가발인지라 결혼식 당일 다듬고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한 집 앞 이발소가 하필이면 ‘야릇한’ 곳이었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시기라도 그렇지 이건 정말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냥 대충 자르는 둥 마는 둥 뒤집어쓰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하여간 다들 배꼽 잡고 웃는 하객들을 뒤로하고 떠난 신혼여행지가 경북 경주였다.

젊은 눈에도 갓 개장한 보문단지는 ‘새마을’식의 ‘촌티 플러스 어설픔’이었지만 옛 유적은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아스라하게 의식 저편 한구석에 흑백사진으로 남은 풍경 한 장이 내 반쪽 시골생활의 한 공간을 차지할 줄은 정말 몰랐다. 관광지 택시 기사가 끌고 다닌 많은 유적지 가운데 나는 유독 계림(鷄林) 숲이 인상 깊었다. 맨땅에 기둥 굵은 고목들이 몇 가닥 가지를 얹고 여러 나무들과 조화를 이룬 숲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웠다. 전설 그대로 혁거세가 알에서 나올 듯도 했다.

지금은 하늘을 찌를 듯 울울창창한 느티나무 숲이 되었지만 원래 이곳은 어머님이 키우시던 소 우사 배설물 집합소가 있던 자리다. 아무리 조심해도 당연히 냄새에 날벌레 세상이었다. 소 키우는 일을 거두신 뒤 이곳을 정리하고 내 손목 굵기의 느티나무 수십 주를 심은 것이 한 이십수 년 전이 아닌가 한다. 느티나무는 빨리 자라고 너무 크기 때문에 집에 어울리지 않으니 솎아 팔라는 아버님의 충고를 멀리한 것은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계림의 기억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아래 있으면 마음이 고상해지고 탈속(脫俗)의 득도(得道)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곳을 갖고 싶었다. 나무가 웬만큼 자랐을 때 나는 계림에 더해 종묘도 좀 흉내내어 느티나무 밭 주변을 기와로 야트막하게 담을 쳐 정방형의 공간을 만들었다. 앉아 쉴 수 있게 한 부분에 고벽돌을 깔아 의자도 가져다놓고 해먹도 걸어놓았다.

십수 년의 경험으로 보자면 송구하지만 아버님의 새마을식 근대화 프로젝트보다는 나의 계림 흉내내기가 아무래도 여러모로 더 나았던 듯싶다. 아니 더 나아가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참으로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5월 초순 느티나무 잎이 파릇하게 나기 시작할 때 숲 밑에 앉아 나뭇잎을 올려다보면 그 사이로 비치는 푸른 하늘과 신비한 햇살, 그리고 부서질 듯한 공기로 인해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한여름 느티나무 그늘은 또 어떤가. 여러 그루가 서로 경쟁하며 위로 크다보니 높이 솟은 시원한 숲 그늘이 닭백숙 한 그릇과 부채 바람 몇 점으로 여름나기에 아주 그만이다. 이제 한 몇 주만 지나면 만추의 멜랑콜리가 느티나무 밭 낙엽 위에 수북하니 쌓일 것이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그 고상한 기품과 호사를 이효석처럼 부티 나는 ‘모던 보이’로 살지 않아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느티나무 숲의 효용은 낭만에서 그치지 않는다. 12월이 되어 수북이 쌓인 낙엽이 부서질 듯 마르는 시기에 이르면 우리 부부는 낙엽을 모아 볕에 좀 말렸다가 자루에 담아 밟거나 기계에 넣어 잘게 부순 뒤 큼직한 마대에 담아 보관한다. 이 갈색 부스러기들은 (언젠가 신문에 보도된) 나만의 퇴비화 변기 덮개로 쓰이거나 다음해 봄에 쓸 퇴비를 만드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그리고 서리 맞아 누추해진 텃밭의 잔해를 거두고 그 위에 살포시 정갈하게 덮어줘 한여름 수고한 밭을 마지막으로 치장해주는 데도 쓰인다. 겨울 되어 삭풍 몰아치면 마른 가지들이 부서져내리고 이것을 모으면 훌륭한 땔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느티나무 밭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양하의 수필 한 소절을 빌려 상찬하며 글을 마침이 마땅할 것이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사족: 숲이라고 하여 꼭 넓을 필요는 없다. 일본의 한 노부부는 200평도 안 되는 공간에 집 짓고 텃밭 만들고 숲까지 훌륭하게 조성했다. (내일도 따뜻한 햇볕에서)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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