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신랑이 하객들 앞에서 인사를 하는데 덜컥 가발이 벗겨지고 까까머리 군인 머리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군대 말년에 2주 휴가를 더 얻기 위해 벌인 나의 결혼식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난생처음 써보는 가발인지라 결혼식 당일 다듬고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한 집 앞 이발소가 하필이면 ‘야릇한’ 곳이었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시기라도 그렇지 이건 정말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냥 대충 자르는 둥 마는 둥 뒤집어쓰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하여간 다들 배꼽 잡고 웃는 하객들을 뒤로하고 떠난 신혼여행지가 경북 경주였다.
젊은 눈에도 갓 개장한 보문단지는 ‘새마을’식의 ‘촌티 플러스 어설픔’이었지만 옛 유적은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아스라하게 의식 저편 한구석에 흑백사진으로 남은 풍경 한 장이 내 반쪽 시골생활의 한 공간을 차지할 줄은 정말 몰랐다. 관광지 택시 기사가 끌고 다닌 많은 유적지 가운데 나는 유독 계림(鷄林) 숲이 인상 깊었다. 맨땅에 기둥 굵은 고목들이 몇 가닥 가지를 얹고 여러 나무들과 조화를 이룬 숲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웠다. 전설 그대로 혁거세가 알에서 나올 듯도 했다.
지금은 하늘을 찌를 듯 울울창창한 느티나무 숲이 되었지만 원래 이곳은 어머님이 키우시던 소 우사 배설물 집합소가 있던 자리다. 아무리 조심해도 당연히 냄새에 날벌레 세상이었다. 소 키우는 일을 거두신 뒤 이곳을 정리하고 내 손목 굵기의 느티나무 수십 주를 심은 것이 한 이십수 년 전이 아닌가 한다. 느티나무는 빨리 자라고 너무 크기 때문에 집에 어울리지 않으니 솎아 팔라는 아버님의 충고를 멀리한 것은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계림의 기억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아래 있으면 마음이 고상해지고 탈속(脫俗)의 득도(得道)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곳을 갖고 싶었다. 나무가 웬만큼 자랐을 때 나는 계림에 더해 종묘도 좀 흉내내어 느티나무 밭 주변을 기와로 야트막하게 담을 쳐 정방형의 공간을 만들었다. 앉아 쉴 수 있게 한 부분에 고벽돌을 깔아 의자도 가져다놓고 해먹도 걸어놓았다.
십수 년의 경험으로 보자면 송구하지만 아버님의 새마을식 근대화 프로젝트보다는 나의 계림 흉내내기가 아무래도 여러모로 더 나았던 듯싶다. 아니 더 나아가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참으로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5월 초순 느티나무 잎이 파릇하게 나기 시작할 때 숲 밑에 앉아 나뭇잎을 올려다보면 그 사이로 비치는 푸른 하늘과 신비한 햇살, 그리고 부서질 듯한 공기로 인해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한여름 느티나무 그늘은 또 어떤가. 여러 그루가 서로 경쟁하며 위로 크다보니 높이 솟은 시원한 숲 그늘이 닭백숙 한 그릇과 부채 바람 몇 점으로 여름나기에 아주 그만이다. 이제 한 몇 주만 지나면 만추의 멜랑콜리가 느티나무 밭 낙엽 위에 수북하니 쌓일 것이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그 고상한 기품과 호사를 이효석처럼 부티 나는 ‘모던 보이’로 살지 않아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느티나무 숲의 효용은 낭만에서 그치지 않는다. 12월이 되어 수북이 쌓인 낙엽이 부서질 듯 마르는 시기에 이르면 우리 부부는 낙엽을 모아 볕에 좀 말렸다가 자루에 담아 밟거나 기계에 넣어 잘게 부순 뒤 큼직한 마대에 담아 보관한다. 이 갈색 부스러기들은 (언젠가 신문에 보도된) 나만의 퇴비화 변기 덮개로 쓰이거나 다음해 봄에 쓸 퇴비를 만드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그리고 서리 맞아 누추해진 텃밭의 잔해를 거두고 그 위에 살포시 정갈하게 덮어줘 한여름 수고한 밭을 마지막으로 치장해주는 데도 쓰인다. 겨울 되어 삭풍 몰아치면 마른 가지들이 부서져내리고 이것을 모으면 훌륭한 땔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느티나무 밭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양하의 수필 한 소절을 빌려 상찬하며 글을 마침이 마땅할 것이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사족: 숲이라고 하여 꼭 넓을 필요는 없다. 일본의 한 노부부는 200평도 안 되는 공간에 집 짓고 텃밭 만들고 숲까지 훌륭하게 조성했다. (내일도 따뜻한 햇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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