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옌볜의 국가조직에서 ‘간부질’ 하던 ‘지식분자’ 박씨가 어찌어찌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의 반시골에서 또 다른 ‘지식분자’(?)인 나와 같이 삽질을 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상념이 저절로 물밀듯 다가온다. 그의 조부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하고도 특별시의 동대문 근처에서 누대를 살아왔는데 어떤 연유인지 일제시대에 만주로 이주했다. 박씨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히 중국 국적자이지만 말투나 사고방식, 그리고 행태를 참고하자면 중국인보다는 북한인에 가까운, 지극히 ‘조선’적인 사람이다. 내가 11대 종손이라니까 뭣 좀 아는 줄 알고 어떻게 하면 자신과 식솔을 한국 내 밀양 박씨 족보에 올릴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나로 하여금 밀양 박씨 종친회 몇 곳에 전화를 걸게까지 했다.
나보다 몇 해 아래지만 그를 보면 이토록 변해버린 우리네 모습들의 수십 년 전 원형질이 체현(體現)된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된다. 내가 삼십 몇 년 전에 난생처음 미국이라는 풍요로운 사회에 발을 딛고 느꼈던 이질감과 문화적 충격을, 강도는 비록 약하더라도 그 또한 한국에 와서 유사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의 발언 중 가장 흥미 있고 동시에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토로한 대목이었다. 중국에 살 적에는 좀 가난해도 편안했는데 이곳에 오니 부부가 모두 막일을 하여 물질적으로는 조금 더 풍요로워졌어도 돈을 더 벌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해져서 항시 일거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80대 중반인 나의 부친께서 장남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듣고 던지신 한마디 답변에 우리 시대의 세대 간 시각차가 농축돼 있어 참으로 황망했다. “그러니까 한국이 발전했지.” 산업화 세대의 전형으로 당신 또한 국가조직에서 ‘간부질’을 한 ‘지식분자’ 출신의 부친은 경쟁과 부지런함의 미덕을 들어 장남의 미덥지 못한 민주화 세대 사고방식을 우회적으로 이렇듯 나무라신 것이다.
사설이 좀 길어진 연유는 많은 이들이 돌아와 살고 싶어 하는 ‘시골’이란 곳이 KBS 이나 나훈아의 노래 에 나오는 고향 같은 곳이 아니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싶어서다. 조선족 박씨의 예에서 보듯 우리 시골은 (도시에 종속된 동시에) 이미 세계화라는 네트워크에 심각하게 플러그인돼 있기에 우리네 마음속에 은연중 각인된 (복잡하고 타락한 도시 대 단순하고 순박한 시골이라는) 이분법적 이상향으로서의 시골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시인 백석은 흰 눈 내리는 날 사랑하는 여인 나타샤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토록 용감하고 낭만적인 시인의 ‘가난한 기백’은 삶에 지쳐 전원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큰 위무가 되고 자존감을 세워주며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근원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언론이 전하는 각종 데이터와 통계 수치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귀농이 시인의 ‘기백’은 앗아가버리고 ‘가난’만을 남기기 쉽다고 경고하는 요즈음이다. ‘지피지기 (하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 했던가. 우리는 시골로 오기 전에 나의 연재가 중요시하는 실사구시의 실전용 테크닉 섭렵도 중요하지만 이론적 무장도 어느 정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박씨는 참으로 부지런하다. 비록 ‘지식분자’연하는 와중에 가끔씩 고집을 내세우기는 해도 아침 7시면 벌써 도착해 일터를 정리하고 각종 장비에 제자리를 매김하며 일할 준비를 한다. 어느 일터에선가 면전에서 “왜 중국 사람을 데려왔느냐!”는 수치를 겪은 뒤 행동으로 대답하며 생긴 경쟁력 강화 방안이란다. 이번 일요일에 한판 같이 뛸 수 있느냐고 전화하니 지금은 군부대 철책 보수 작업 중이라 힘들단다. 남한 출신의 조부를 가진 나와 같은 핏줄의 중국인이 다시 조부의 고향으로 와서 자신의 (법적) 조국과 혈맹관계에 있는 북한을 견제하기 위한 철조망 공사를 하는 이 아이러니와 역사적 비극! ‘박씨 연대기’를 통해 본 우리의 디아스포라는 나의 반쪽 시골에서도 아직 진행 중이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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