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의 기온이 섭씨 3~4℃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내 앞에서 목에 힘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적잖은 세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농촌 노인형’ 잠 습관에 길들여진 나는 이맘때쯤이면 새벽에 일어나 나무 난로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인 뒤 원두를 갈아 향기 진한 커피를 두 잔 마련한다. 커피향이 좀 퍼지고 실내가 아늑하게 기분 좋아질 즈음 나는 조용히 침실로 가 가장 정중하고 느끼한 목소리로 아뢴다. “싸모님, 커피 준비되었는데요.” 여러 사람으로부터 ‘너만 잘 살면 다냐!’ 혹은 ‘이렇게 부부간 (위계) 풍토를 흐려도 되느냐!’는 둥 각종 비난에 시달렸지만 나의 아내로부터 하루 세끼 맛난 밥 얻어먹기 작전은 경험칙(經驗則)에 의해 요지부동이다. 만추의 주말 새벽에 향 좋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아내가 구술(口述)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문어체(文語體)로 요약정리 한다.
“농사로 치자면 시답잖다는 말도 과분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반쪽 시골농사지만 그래도 가을 이맘때쯤 되면 손발이 바빠진다. 짧은 해에 게으르기 짝이 없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픈 시절이다. 고구마와 감자는 벌써 캐서 쟁여놓았지만 콩과 깨도 털어야 하고 밭에 거름 주고 양파도 심어야 한다. 그래도 아직 걷지 않은 양배추도 있고 실하게 속이 차가는 배추도 건사해 김장 준비도 해야 한다. 여기저기서 부쳐오고 보내온 감이며 사과로 식초도 담가야 한다. 그나마 콩 삶고 메주 띄워 내년 봄 된장 담글 준비 없는 것이 다행이다. 그래도 한겨울 먹을 청국장은 올해 좀 띄울 요량이다. 그런데 올가을에는 한 가지 더 힘든 일이 생겼다. 꽃밭을 재정리해야 하는 일이다.”
선인장 물 안 주어 죽이는 특기가 있던 서울내기 아내가 손목과 손가락 관절을 유념할 정도로 호미질을 해대더니 꽃과 작물에 관해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지금쯤 무얼 어떻게 심어야 하느냐’는 문의도 들어오고 길거리를 지나다 마주치는 이름 모를 여러 서양 화초를 보기만 하면 이름은 물론이고 해를 좋아하는지 반그늘이 좋은지 겨울나기는 어찌해야 하는지 등등 성장 속성까지 줄줄이 꿰어댄다. 유홍준의 말마따나 ‘사랑하면 절로 알게 된다’더니 카탈로그며 인터넷 서치의 결과가 아이들 표현을 빌리자면 꽃에 관한 한 ‘잡지식의 대마왕’ 수준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니 아내의 꽃밭 사랑은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욕심에 이것저것 보기에 예쁘다 싶으면 가져다 심기 바빴다. 한번 불이 붙으니 무섭게 번졌다. 그 기세로 10여 년 전인가 좀 무리를 하여 부부가 열흘 좀 못 되게 영국의 정원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후 아내의 정원 사랑과 관심은 ‘급’과 ‘격’이 달라졌다. 이것저것 집안 마당쇠인 나에게 주문하는 양이 많아졌고 ‘공부’를 해대기 시작하더니, 피는 시기와 색조 그리고 식물의 높낮이를 고려해 꽃밭을 만들었고 드디어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정원을 갖게 되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시작이었다. 정원은 그냥 만들어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기 보살피듯 관리해야 했다. 관리 중에서도 현상 유지 정도의 일반관리가 있고 꽃밭을 구조조정하는 특별관리가 있는바, 올해가 바로 구조조정의 해라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이것저것 심어놓고 가꾸다보면 식물들의 과밀 현상이 일어난다. 이럴 때면 지나친 온정으로 식물들을 감싸는 대신 과감하게 삽과 호미로 캐내고 자르고 갈라서 버릴 것은 버리고 옮길 것은 옮겨주어야 한다. 한해살이 식물은 큰 문제가 없지만 대부분의 다년생 숙근초(宿根草)들이 3~4년에 한 번씩 맞아야 하는 숙명이다. 물론 식물마다 조금씩 달라, 장미는 장미대로 난초류는 난초류대로 관리 방식이 다 다르다. 이 바쁜 와중에 아내는 아름답던 꽃밭을 완전히 패대기치듯 쑤셔놓고 마당쇠에게 이른다. 이것들 옮길 장소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미안한지 한마디 덧붙인다. “인생 길지 않아. 앞으로 꽃 봐야 몇 번이나 더 보겠어. 때 놓치면 1년 더 기다려야 해.” 짐작건대 아내의 욕심은 장미정원, 붓꽃정원, 연꽃정원 등 종류별 정원으로 진화할 것만 같고 이런 우려가 점점 현실화하는 겁나는 만추의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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