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어설픈 ‘반쪽’ 시골생활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골’이라는 어휘가 풍기는 아우라가 있기에 시골생활에서 외국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내심 매우 어설프고 멋쩍다. 고개 너머 사시는 고모님이 막내아들 덕에 다녀오신 생애 최초(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삐까뻔쩍 2박3일 중국 여행이라면 모를까 10년 전에 부부가 멀리 영국까지 날아가 8박9일을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러운 정원 투어에 온전히 쏟아부은 이야기는 좀 ‘아니올시다’이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편치 못한 마음을 넘어 소개함에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다. 지난번 글(제1037호)에서 영국 여행을 다녀온 뒤 아내의 정원에 대한 관심이 ‘격’과 ‘급’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고하였으니 이번 글에서 왜 그런지 한 걸음 더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다. 더구나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영국 정원 여행의 짧은 체험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나의 반쪽 시골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이를 거론치 않고는 내 사는 곳의 속살과 정수를 온전히 설명할 길이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것을 자축하며 거사한 여정은 다행스럽게도 당시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 반추(反芻)하기 안성맞춤이다. “6월의 신부(June bride)라는 말이 그냥 생겼겠어? 아마도 지금쯤 그곳 날씨가 끝내줄 거야”라는 아내의 감언이설에 혹한 어리벙벙 남편은 그냥 짐꾼 겸해 반값 가격의 새벽 12시5분 아랍에미리트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파김치가 되어 난생처음 방문하는 영국은 낯설었다. 모든 것이 반대인 ‘거울 운전’을 수동 기어로 조작하며 ‘등골 오싹’을 몇 차례 넘기니 런던 외곽의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영국 동남부와 코츠월드(Cotswold)라고 불리는 남서부의 정원 10여 곳을 둘러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구약 한 구절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돌아본 모든 곳이 참으로 감탄사를 발할 정도의 감히 따라하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이들 중 그래도 한 곳을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매우 주저하는 마음으로 고민고민 끝에 낭만의 극치로서 런던 동남부에 위치한 시싱허스트 정원(Sissinghurst Castle Garden)을 꼽을 것이고 그다음은 정원의 교과서로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남서부 치핑캠던(Chippingcamden)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히드코트매너(Hid Cote Manor) 정원을 꼽을 것이다. 하나만 더 꼽으라면 치핑캠던 인근의 폐허 정원인 서들리성(Sudley Castle) 정원을 택할 것이다. 그 밖에도 적잖은 명소가 있지만 (아마도 아파트 화단이나 조경업자가 조성한 공원의 왜색 짙은 판박이 화단이 주로 접하는 정원의 거의 전부인) 우리네 대다수 갑남을녀들에게는 ‘이게 미?’일 것이니 생략하자. 다만 이 말은 전하고 싶다. 촌구석 백면서생에게 영국 정원 경험은 비유하자면 200여 년 전 박지원의 였고 100여 년 전 유길준의 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결과 세계의 부가 모이고 쌓여 가능했던 영국의 정원에 어두운 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인간의 창의성이 이 정도까지도 갈 수 있구나’ 하는 상상력과 격조 있는 문화의 만남이 영국 정원이라는 나름의 해석에 도달했다. 게다가 그것이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강조하는 우리네 원림(園林) 문화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욱 마음 푸근했다. 그리하여 영국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이곳 삶터와 관련해 한 가장 첫 번째 일은 주목이며 향나무로 수벽(樹壁)을 치고 나무 심기가 마땅치 않은 곳엔 돌과 조선 기와로 야트막한 담을 쌓는 것이었다. 내 사는 곳을 텃밭이면 텃밭, 꽃밭이면 꽃밭, 혹은 진입로나 주차장 등으로 기능에 맞추어 나누고 이 나뉜 공간을 짙은 초록의 벽으로 둘러쳐 아늑한 실내를 만들어 그곳에 무언가 내 삶을 표현하고 싶었다. 일전에 소개한 ‘두르면 넓어지는 공간이여’(제1014호)는 이런 경험의 소산이었음을 뒤늦게 밝힌다. 한 뼘 땅이라도 놀리기 뭣해 논두렁·밭두렁에 콩 포기라도 심어야 하시는 8순 고모님이 보시기에는 ‘뭔 지랄’일지도 모르나 나이 든 조카도 아주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모님, 냅둬유. 인생 길잖여유. 저도 생각이 있구먼유.’ 그리하여 나이 든 조카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나무를 심어 수벽을 쳤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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