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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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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친 언덕에 잔디를 깔아

‘시가 물고 주말에 잔디 깎는 삶’을 꿈꾸고 단행하는 귀촌,
수십 년 살면서 잔디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실용성에 더 유념하게 된다네
등록 2014-08-22 16:37 수정 2020-05-03 04:27
언덕 경사면에 조성한 잔디밭. 하도 토사가 흘러내리고 흙이 파여 심어놓았는데 이제는 토사 완전 정복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엄마 품처럼 폭신하다. 강명구 제공

언덕 경사면에 조성한 잔디밭. 하도 토사가 흘러내리고 흙이 파여 심어놓았는데 이제는 토사 완전 정복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엄마 품처럼 폭신하다. 강명구 제공

내가 사는 곳은 상수원 보호구역부터 시작해 몇 겹의 정부 규제로 묶여 있어 방 한 칸 늘리는 것은 고사하고 (아파트로 치면 베란다에 해당하는) 마루를 늘리는 것도 여간 면사무소의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이런 연유로 서울서 과히 멀다고 할 수 없음에도 자연히 젊은 층의 유입이 어려워 환갑임에도 마을 청년회 가입 권유를 받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정말 오랜만에 젊은 부부가 떡방앗간 옆에 여성잡지에 소개될 것 같은 서구풍의 근사한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해왔다. 출퇴근 때 매일 지나는 마을 초입에 집이 위치했고 앞마당이 정원 공사로 훤히 들여다보여 자연히 본의 아니게 눈길을 주게 되었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사이의 본의 아닌 관찰일지라도 달포가 지나니 대충 감이 잡혔다. ‘도시민들이 생각하는 전원생활의 스테레오타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조경업자에게 맡겨 앞마당에 너른 잔디밭을 조성하고 경계를 따라 이런저런 수목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집 저 한편으로는 잡초가 두려워 검은 비닐로 멀칭한 조그만 텃밭도 보인다. 본인들은 약간 떨떠름해하며 무슨 유치한 소리냐고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지만 내 보기에 그들의 꿈은 남진의 히트곡 첫머리 가사와 일치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 년 살고 싶어.”

대개의 경우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민들이 상상하는 ‘저 푸른 초원’은 다름 아닌 잔디밭이고, ‘그림 같은 집’은 서구풍의 목조주택이다. 내 집을 방문한 어느 지인의 고백에 따르면 1970∼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가장 환상적인 목가(牧歌)풍 낭만은 “시가를 입에 물고 주말에 너른 앞마당의 잔디를 깎는 모습”이었단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저녁이 있는 삶’이 환상적 정치 구호로 회자되는 나라이니 ‘시가 물고 주말에 잔디 깎는 삶’을 말해 무엇하랴.

평생 골프장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처지건만 십수 년 전 이곳에 정착할 때 나의 ‘저 푸른 초원’도 이 젊은 부부와 과히 다르지 않았다. 나의 작업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지금은 용도 폐기된 잔디(풀) 깎는 기계의 수가 이를 증명한다. 적잖이 잔디를 심고 죽이고 그리고 풀을 깎아댔고 아직도 줄기차게 풀을 다듬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곳 생활 십수 년에 잔디에 대한 나의 관점은 많이 바뀌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가 주는 그림 같은 아름다움의 매력은 역시 버리기 힘들지만 그보다는 잔디가 주는 실용성에 더 유념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애인도 좋지만 어려울 때 같이하는 항심(恒心)의 조강지처가 실제로는 더 아름다운 법이다.

잔디는 무엇보다 토사 방지에 그만이다. 집 뒷산 경사지를 타고 내리는 세찬 빗줄기는 금세 등성이 길에 깊은 골을 만들어놓고 사이사이로 돌덩이를 드러낸다. 비가 갠 뒤 그렇게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잘 번진 잔디는 그 어떤 경사에서도 아기를 가슴에 품은 엄마의 손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흙덩이를 잡아준다. 경사면은 잔디밭 조성의 제1의 필수조건인 볕과 배수가 그만이기에 누가 무어래도 내 생각에 잔디밭 제1의 후보지는 경사면이다.

이뿐이 아니다. 잔디는 위로 크는 속도에 비해 옆으로 번지는 속도가 빠르기에 풀 깎아주는 수고를 덜어주고 풀이 자라도 길이가 짧고 균일해 보기에도 아름답다. 습하고 더운 여름날 며칠만 게을러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자라는 잡초와 달리 한 일주일 넉넉하니 쉬고 깎아줘도 되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나 많은 일이 그러하듯 지나침은 약간 모자람만 못한 것. 잔디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편애는 자칫 쓸데없는 노고와 환경 파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전원에서 자연과 좀더 친하게 살려는 삶이 골프장 클럽하우스와 같아서는 될 말이 아니지 않겠는가? 다음호 글에서는 잔디 가꾸기의 주의점과 잔디의 집착에서 벗어나 친환경적이고도 아름다운 ‘저 푸른 초원’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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