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아스튜디오가 2024년 5월 공개한 티저영상에서 4세대 걸그룹의 평균 데뷔 나이는 16.6살로 데뷔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크레아스튜디오 유튜브 갈무리
얼마 전 처음 접하고 잠깐 현실을 부정했던 단어가 있다. ‘7세 고시’와 ‘4세 고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명 학원과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이르는 말이었다. 특히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시험을 의미하는 고시를 처음 치르는 나이가 4살까지 내려가는 동안, 케이팝 아이돌이 될 수 있는 나이는 이제 5살, 상한선은 15살로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입학 경쟁이 유아기까지 내려갔다면, 아이돌 데뷔 경쟁도 마찬가지다. 크레아스튜디오가 기획하고 엠비엔(MBN)에서 방영하기로 예정한 ‘언더피프틴’ 이야기다.
우선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자.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으로 오디션 명가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크레아스튜디오는 국적, 인종 불문 만 15살 이하의 ‘소녀’만 지원할 수 있는 케이팝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피프틴’을 예고했다. 이를 두고 여러 언론은 ‘성인처럼 꾸민 유아’ ‘8세 아이에게 크롭티’ ‘아동학대’ 등에 해당한다며 해당 프로그램이 여성 아동을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언더피프틴’의 티저 영상과 공식 계정에서는 이들의 나이, 방송용 스타일링과 ‘아이돌다운’ 포즈와 표정 등을 담은 이미지를 한가득 전시하고 있다. 제작진에 따르면 오디션 참가자 중에는 만 5살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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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아 스튜디오 유튜브 갈무리.
그런데 ‘언더피프틴’은 충격적이고 분노를 자아낼지언정 특수하거나 이례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그 이유는 오디션 공개 모집 영상에서도 나타나듯 , 여자 아이돌의 평균 데뷔 나이는 꾸준히 낮았기 때문이다 . 영상에서는 1 세대부터 4 세대를 대표하는 걸그룹 에스이에스( S.E.S.), 소녀시대 , 트와이스 , 뉴진스가 모두 평균 16~17살 정도에 데뷔했음을 보여주면서 5 세대는 평균 15 살이 될 것이라는 예고 (?) 를 하고 있다 . 따라서 ‘ 언더피프틴 ’ 은 특수한 문제 사례가 아니라 기존 아이돌 산업의 연장선에서 산업 자체를 돌아보는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 마땅하다 .

2015년 데뷔한 걸그룹 트와이스에도 16살 멤버들이 포함돼 있었다. 연합뉴스
내가 본격적으로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 것은 2021년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활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6~2018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돌에 대한 과도한 성적 대상화나 아이돌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팬들의 비판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공항 출입국과 출퇴근 과정에 찍힌 사진, 그리고 카메라가 없는 사적인 시간의 목격담을 소비하지 말자는 ‘공출목(공항, 출근길, 목격담의 줄임말) 지양’과 같은 움직임 또한 덕질 시작과 함께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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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인 아이돌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그러한 비판적 의식 한가운데에 늘 존재했다. 미성년자 아이돌 성적 대상화야말로 케이팝 산업에서 아티스트들이 경험하는 문제가 집약된 지점이기 때문이다 . 미성년자 아이돌 지망생들은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로부터 분리돼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고 , 사생활 대부분을 박탈당한 채 남들과는 다른 일상을 살아야 한다 . 그렇기에 부당한 계약이나 위험한 조건을 가려낼 만한 역량을 기를 새도 없이 일을 시작하고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이기 일쑤다 . 온 · 오프라인에서의 성희롱 · 성추행 등의 성폭력에도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 여기서 미성년자 - 여성 - 아이돌이라는 지위들의 접합은 이러한 문제들을 중첩해서 경험하는 조건이 된다.
최근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미소녀’라는 표현이 아이돌 관련 콘텐츠에서 부쩍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어떤 걸그룹의 소속사는 공식 채널에 올라가는 롱폼, 숏폼 영상에서도 멤버들을 (‘○○시 최고 미소녀 등장!’과 같이) ‘미소녀’라고 칭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팬들 또한 이 표현을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면서(‘미소녀의 축복이 끝이 없다’) ‘미소녀’라는 표현이 아이돌-팬덤 사이의 밈처럼 자리잡는다. 여성 청소년의 재현에서 이전보다 나아갔다는 호평을 받는 이 그룹조차 수록곡들에서는 미성년자인 멤버에게 상의를 일부 들어 올리는 안무를 주거나 성적인 함의가 강한 가사를 담는 등 상당히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아이돌판에 소구할 수 있는 매력과 동시에 코어 팬덤 구축을 위한 소속사의 전략과도 관련됐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핵심에 있는 ‘소녀’는 그 나이대에 기대되는 인간성 내지는 ‘생기’인 명랑함과 구김살 없음을 상품화함으로써 이들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귀여움, 청순함, 섹시함과 같이 공존하기 어려운 매력들을 모두 충족하길 요구하면서 어린 여성들을 다중의 구속으로 몰아넣는 기표다. 이것은 무대에 오른 어린 여성들을 마음 편히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넘어, 자기 자신의 매력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관심의 양과 질에 개입해야 하는 주체로 만들어낸다.(‘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 조혜영 엮음, 여이연 펴냄)
이때 주체는 이들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발성조차도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구속과 제약들을 조건 삼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체란 우리가 타인 혹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거나 인정하는 등의 관계 안에서 놓이게 되는 ‘자리’다. 그것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언가에 익숙해지면서 성취해야 하는 대상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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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어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특정한 매력과 수익성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소녀’는 개성이나 매력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가 된다. 특히 산업에서 열악한 조건들이 중첩되면서 경험하게 되는, 취약한 주체. 얽매이고 붙들어야만 간신히 매달려 있을 수 있는 자리로서의 소녀.
‘아직 미성년자’와 같은 말들로 어린 여성 아이돌 아티스트들을 보호하려는 팬들의 반응은 인터넷에서 자주 보인다. 이는 주로 노출이 많은 의상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부각하는 안무, 성적인 뉘앙스가 강한 노랫말이나 콘셉트, 그리고 이로부터 따라오는 아이돌에 대한 성희롱에 대한 대응이다. 나이를 핵심 변수로 삼는 것은 자발성의 함정이 되기도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주체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가능한 개념이지만, 그 자기결정권이 ‘네가 원해서 한 것 아니냐’ ‘알면서도 시작한 것 아니냐’라는 비난의 고리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크레아스튜디오 쪽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들에 대해 “아이돌을 시작하기엔 아직 어리다는 어른들의 걱정이나 편견을 완전히 깨줄 만큼 꿈에 대한 의지와 소신이 확고한 요즘 세대 진면목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인류학에는 ‘간파’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구조에 속한 이들이 자신이 놓인 지위나 상태, 구조가 굴러가는 원리를 꽤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특정한 ‘제약’과 오래된 문화적 패턴으로 인해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한다. 영국 인류학자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 따르면 간파는 탈출의 역량보다는 ‘알면서도 당하는’ 메커니즘의 일부인 것이다. ‘힘든 거 알고 시작하지 않았느냐’는 말, ‘너의 선택’이라는 말은 간파와 제약이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욕망의 실현 경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집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1세대 아이돌 걸그룹 에스이에스. 1997년 데뷔한 에스이에스 멤버 3명도 모두 10대였다. 한겨레 자료 사진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로로서의 아이돌 산업, 그리고 거기서 맺게 되는 관계들이다. 케이팝 아이돌 산업은 예술, 유명세, 출세 등으로 향하는 욕망을 자극하여 빛나는 무대 위에 소녀들을 올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매력적인 주체-상품을 만들어낸다. 관심 경제에서 이들은 외모부터 인성, 실력까지 무한한 미시적 재평가의 굴레로 빠져든다. 욕망과 착취, 성취와 절망은 언제나 한 덩어리다. 모두가 관심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절규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여성 아이돌 아티스트들은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매 순간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증명하고, 사랑해달라고 외치며 가장 체계적으로 관심에 의존하게 되는 이들이다. 사랑이든 비난이든, 아이돌 아티스트들이 받는 관심이 과연 개개인이 견딜 수 있는 게 맞긴 할까?
지금의 케이팝 아이돌 산업은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양과 속도로 관심을 채굴·축적·이전하는 관심 경제의 폭력성, ‘소녀성’ 자체를 상품이자 노동력으로 재구성하는 소녀 산업과 공모하며 미성년자 여성의 애착과 열정을 착취하고 있다. ‘언더피프틴’은 모집 대상 설정만으로도 이러한 경향성을 산업의 ‘트렌드’ 정도로 축소함으로써 케이팝 아이돌 산업을 더욱 잔인하게 만드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이 글은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현주소를 성찰하자는 절박한 제언이다. 단지 ‘몇 살부터’ 이런 일을 해도 되느냐를 넘어, ‘이런 일’ 자체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한 명의 팬이자 아이돌과 같은 불안정 노동자, 그리고 이들의 동료 시민으로서, 조금 다른 아이돌의 가능성을 함께 상상해보자고 간절하게 제안한다. 빛나기 위해 추락해야 하는 잔인한 날갯짓을 멈출 수 있게 해야 한다.
안희제 문화평론가·‘망설이는 사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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