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세상은 따로 가는가. 이번 선거에서 유례없이 한 후보를 절실하게 밀었던 한국 영화계는 예상 못한 패배로 극히 우울하고 침잠하다. 세상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지 못했으나 영화산업은 올 한 해 유난히 흥했던 것처럼 보인다. 2012년은 아마도 한국 현대영화의 흥행 역사를 새로 쓴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건 일단 흥행 순위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표 참조).
영화판도 정치판처럼 일단 이겨야 ‘장땡’
지난 1년 동안 한국 영화의 개봉 편수는 장편 기준으로 144편이다. 경기가 바닥일 때 70∼80편 제작되는 걸 고려하면 활황세를 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관객 1천만 명이 넘는 영화가 2편 나온 것 역시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이 될 것이다. 은 13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올해 흥행 순위 1위뿐 아니라 한국 영화 역대 흥행 순위 1위를 갈아치웠다. 역시 1200만 관객을 넘겼다. 은 투자배급사 미디어플렉스의 작품이고 는 CJE&M 것이다. 두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흥행 자존심 대결이 영화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려고 지나치게 경쟁을 벌인 것 아니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예컨대 관객 수를 채우려고 벌인 ‘1+1’ 행사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영화판도 정치판과 똑같다. 일단 이기고 보는 것이 ‘장땡’이다. 두 영화가 어떤 ‘치졸한’ 마케팅을 했든, 어떤 독과점 행태를 벌였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관객 400만 명을 넘긴 영화가 9편이나 되는 것도 기현상에 속한다. 한국 영화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이런 현상이 과연 지속될 것인가. 이상용 평론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지난 1년은 극히 예외적이다. 이 현상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국내 영화계는 늘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인 상황으로 치환시키려는 담론의 오류를 범해왔다. 지난 1년을 보면서 사람들은 또 한 번 착시 현상을 빚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올해의 상황은 관객의 취향과 기호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관객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어떤 한 영화의 흐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끊임없이 3D 영화 등 새로운 블록버스터들을 내놓고 있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영화가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지, 관객의 성향이 또 어떻게 확 바뀔지 예상할 수 없다.”
다른 관점에서도 한국 영화계가 지난 1년간 사상누각을 한 것인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평론가 김영진이 바로 그렇게 본다. 그는 지금의 영화계를 보며 흥청망청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마치 서울 강남의 최고 부유층이 산다는 지역의 으리으리한 주상복합형 아파트만을 보다가 문득 자신이 거기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산업 안으로 낄 틈도 안 주는 영화계
“영화는 문화와 산업이 같이 가는 분야다. 미학적으로 인정받는 영화가 산업 안에서 어느 정도 튼튼하게 살아가거나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영화적 기반의 건강성은 그런 데서 확보된다. 그런데 한국 영화계의 고질적인 현상은 미학적으로 뛰어나거나 그런 도전 정신을 인정받는 영화는 도저히 산업 안으로 낄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상수·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나마 유명세의 기회를 얻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예술관과 비슷한 또 다른 작가들의 영화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이 존재하는 한 국내 영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해간다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한국 영화계가 꼭 풀어야 할 숙제는 스크린 독과점에 따라 이른바 ‘퐁당퐁당’이라 불리는 교차상영 방식이 일상화돼 있다는 점이다. 이건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외화에도 적용되는, 심각한 문제다.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아침에 한 번, 새벽에 한 번 하는 식으로 스크린을 건너뛰며 상영되기 일쑤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미하엘 하네케의 등을 보려면 꽤나 신경 써야 한다. 론 셰르픽이라는 뛰어난 여성감독이 만든데다 앤 해서웨이나 짐 스터게스 같은 청춘스타급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여서 눈길을 끌고 있는 같은 작품도, 한국에서는 끝장 수준이다. 국내 영화계, 극장가가 극단적인 편향성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감독 스스로 조기 종영 선언을 하는 사태까지 튀어나왔다. 민병훈 감독의 는 일종의 영화적 자살을 선택한 경우다. 한동안 영화계는 우리 사회가 겪는 파레토의 법칙(2:8의 법칙. 국민의 20%가 국가 부의 80%을 소유하고 국민의 80%가 부의 20%를 쪼개 나눠 갖는다는 사회·경제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그대로 이어갈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기대와 호기심,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다. 2013년에는 유난히 기대작이 많다.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해 만든 박찬욱 감독의 ,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작업한 김지운 감독의 가 대표적이다. 류승완 감독이 독일 베를린에서 올 로케로 촬영한 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자 영리하고 뛰어난 감독으로 손꼽히는 봉준호의 야말로 2013년 가장 보고 싶은 영화 1순위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틸다 스윈턴 등 개성파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파들의 작품 말고도 국내산 기대작도 꽤나 많다. 최민식·황정민 주연의 , 설경구·정우성 주연의 등등이다. 이 영화들이 2012년의 활황세를 그대로 이어갈 것인가.
10년 주기로 비슷한 사이클 보여
개인적으로 국내 영화계는 10년을 주기로 비슷한 사이클 구조를 갖는다고 본다. 초반에는 항상 활황세지만 후반에는 크나큰 위기가 온다. 10년 주기의 사이클은 초반에 항상 완만하게 오르다가 중반에 급격한 하향곡선을 타는 모양새를 보인다. 따라서 2012년 호황의 영향은 길어야 2014년 정도까지밖에 이르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영화는 늘 오르락내리락한다. 인생도 그렇다. 사회도 그렇다. 지난 1년의 영화계를 들여다보며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오동진 영화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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