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 감독을 생각하면 늘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논다. 이성적으로는 그의 퀴어이즘이 좋다. 충분히 받아들인다. 세상을 바꾸는 핵(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근데 막상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장면, 특히 몸을 섞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조금 불편한 심정이 든다. 보수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막상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근데 그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조차 편견일 터이어서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해진다. 게이 문화에 질색하는 사람들에게는 리버럴한 척,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지만 막상 게이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난감해진다. 이런 태도는 문제가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게이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일까.
해피엔딩하지 못하는 ‘두 남자’들
이송희일 감독의 야심찬 퀴어 3부작 와 그리고 를 보고 나면 어떤 사람들은 평소 동성애에 대한 생각에 큰 진전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소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쩌면 딱 대중적 시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건 이 세 편의 영화가 현재 극장가에서 조용히, 한편으로는 꿋꿋하고 외롭게 상영 중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등은 많은 사람들이 찾을 영화는 아니다. 동성애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흥행 스코어를 올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 3부작은 다소 정치적 어젠다를 던지고 있는 듯한, 선언적인 느낌을 준다. 이송희일 감독이 꾸준히 추구하고 있는 이즘, 그리고 어떻게든 대중에게 퀴어이즘의 진심을 다가서게 하려는 노력 등은 영화의 상업적 성과를 떠나 우리 사회의 진화를 위해 누군가 꼭 해내야 하는 임무처럼 느껴진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는 역저 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페미니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송희일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로빈 우드의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부작 모두 그렇게 큰 스케일의 영화가 아니다. 조금 긴 단편들을 엮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다. 어김없이 두 남자가 나오고 사랑 때문에 지지고 볶고 갈등하고 싸운다. 그리고 섹스를 나누거나 나누는 것으로 암시되는데 어쨌거나 해피엔딩하지 못하고 헤어지기 일쑤다. ‘아,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서로 사랑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아’라는 한숨 섞인 푸념이 들린다.
는 군대 시절 상사와 부하로 만난 두 남자가 주인공이다. 고참이었던 남자는 이미 제대를 했고 그를 사모하는 남자는 아직 복무 중이다. 아직 복무 중인 남자가 휴가 중일 때 둘이 다시 만났다. 사랑은 이미 깨졌다. 한 남자가 제대하며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남자는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커피에 수면제를 타서 먹인 뒤 남쪽 어딘가로 그 남자를 ‘납치한다’. 하지만 섹스하는 도중에 일이 터진다. 둘은 절정에도 이르기 전에 치고받고 싸우고 만다.
“‘퀴어영화’란 용어 자체가 차별을 증명”의 사제지간이든, 의 원나이트스탠드로 맺어진 두 남자의 관계든, 이송희일의 인물들은 맥이 많이 빠졌다. 사회의 불편한 시선에서 시달림을 받았고 그래서 상처가 많다. 외롭고 우울하며 삶이 어둡다. 의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 구조가 전혀 다름에도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 의 정서가 깊이 느껴진다. 한 남자는 상대에게 적극적이고 희생적이지만 그 상대는 늘 그를 피하려고만 한다. 를 본 사람들은 장궈룽(장국영)이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에서도 남자는 상대 남자와 헤어진 뒤 춤을 춘다. 그게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 없다.
동성애의 연인들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장면은 뭇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는 장면과 별 차이가 없다. 한쪽의 마음이 식었거나, 때로는 계급·계층 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갑자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다. 동성애자들도 집착을 하고, 때론 광기를 보이며, 상대를 소유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송희일이 만들어내는 퀴어영화의 특질은 한결같이 우리도 그들 같고, 그들도 우리와 같다는 동일시에서 찾아진다. 그래도 동성애자들은 뭔가 다른 게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이송희일이 얘기하는 차별의 시점을 극복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간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차별’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퀴어영화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 사회에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들 영화를 만들지 않기 위한 역설의 방편이다. 동성애가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어느 날 내가 퀴어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을 때, 세상은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돼 있을 터다.” 이송희일 감독의 말이다.
그는 2006년 를 만들며 커밍아웃했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있지만 영화계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여전히 몇 안 되는 커밍아웃 감독에 속한다. 게이 감독이면 어떠랴 하겠지만 엄혹한 자본주의 영화 환경에서는 이송희일 감독 같은 게이에게는 투자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게이임을 밝히는 것은 국내 영화계에서는 상업영화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처럼 받아들여진다.
이송희일의 이번 3부작은 한국 사회의 견고한 성적 보수의 벽을 조금이나마 균열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처럼 보인다. 그 노력이 참으로 가상한데 그것도 선입견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3부작은, 남자든 여자든 우리 모두는 늘 사랑의 일상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겪어가는 과정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연인이라면 모두 이들처럼 사랑한다. 이송희일의 퀴어 3부작을 권하는 것은 바로 그 동질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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