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선을 설명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영화 연출에서부터 연기, 그림, 그리고 작곡과 노래, 시나리오와 소설 쓰기 등 전방위적으로 재능을 보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29살짜리 젊은이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마치 49살쯤의 나이가 돼서야 발견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경륜까지 느껴진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인간 존재의 양면성 혹은 다면성 그려
개봉을 앞둔 구혜선 감독의 신작 를 보기 전까지, 솔직히 그녀를 지금에 이르게 한 데는 미디어의 특별한 애정이 큰 몫을 담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서는 일단 배우 출신이라는 인상이 너무 짙었다. 그것도 할리퀸류 소설의 여주인공 이미지였다. 아마 그건 TV에서 먼저 낯을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구혜선이 출연했고, 대중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2009년 드라마 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청춘문화의 지나친 과잉쯤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해와 편견이었다. 2010년 에 이어 지난해 완성하고 올해 선보이는 는 뒤늦게나마 그녀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 작품이다. 한 번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녀에게 180도 다른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두 번째 장편임에도 자신만의 색깔을 완성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를 통해 연출의 길을 걷겠다는 그녀의 진심을 보게 됐다. 연기를 제외한 다른 재능 역시 결코 잡다하고 즐비하게 늘어놓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구혜선에게서는 지금 뭔가가 마구 샘솟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의 모든 것은 그림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줄곧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그림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그림은 추상적인 이미지만으로도 나를 담아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속에 무엇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가 늘 고민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태어났는지,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아니, 그런 의문을 30년 가까이 살아오며 한 번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는 그런 나의 고민을 담아낸 작품이다.”
음… 재미없다. 너무 존재론적인 답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혜선에게 흥미가 더 당겨진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말하는 방식때문일 수도 있는데 구혜선은 조곤조곤, 마치 부끄러운 척하면서도 단단하게 단련시킨 자신의 내벽을 드러낸다. 이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직은 주목할 때가 아니라고 봤는데 그건 이미 틀린 생각이다. 한두 번 만나보니 알 것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처럼 길게 얘기해보니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건 구혜선 감독의 마음속 심연이 더욱 궁금해졌다는 의미다.
는 샴쌍둥이의 얘기…라고 설명하면 이 작품이 가진 아우라를 올바르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몸은 하나, 머리는 둘인 한 명 아닌 두 명의 쌍둥이 형제 얘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물리적·표면적인 얘기일 뿐이다. 마치 히드라의 신화처럼 머리 둘 달린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양면성 혹은 다면성을 그린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늘 많은 자신을 담고 산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은 다갈래의 형태로 존재한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늘 나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실존은 늘 고독하기 마련이다.
“돈 없어서 내가 직접 OST 만들어”
영화는 다분히, 그리고 역설적으로 초현실적인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개연성이 적은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빠져들게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보통 특수성에서 시작해 보편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는 시종일관 특수함의 테두리를 지켜간다. 그럼에도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일반화된 주제의 무엇을 느끼게 한다. 마치 비구상의 그림을 보면서 구상화보다 더 사물에 대한 구체성을 읽게 되는 경우와 같다. 는 그래서, 사람들마다 이 영화를 보는 앵글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 영화다. 사람들은 이 영화로 각각의 자화상을 그리게 될 것이다.
“제목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모두 복숭아나무에서 시작해 복숭아나무에서 끝난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프로덕션을 완성하는 내내 복숭아나무라는 제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운명처럼 딱 정해진 제목 같았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탄생과 죽음. 두 가지는 상반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순서만 다를 뿐 생명을 잉태하는 시작의 순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영화 속 두 형제처럼 삶은 비극적인 일들로 이어져 가더라도 생명은 아름답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는 촬영의 구도, 조명의 채도, 인물의 배치, 소품과 주위의 구성 등 구혜선이 감독으로서 미장센의 구축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준다. 머리 둘의 남자는 자신의 또 다른 자신을 감추기 위해 늘 후드티를 입는다. 남자가 머리가 둘인지 모르는 여자는 한쪽 머리의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둘 아닌 세 사람은 어느 날 놀이동산에 가는데, 복잡한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의해 두건이 벗겨진다. 여자는 충격을 받지만 사람들은 무심코 그런 그들을 지나친다. 마주한 두 남녀, 아니 사실은 세 남녀의 정지된 시점 컷과 함께 그 셋을 에워싼 사람들의 물결이 느린 화면으로 포착된 이 장면은 영화 에서 가장 세공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엄친아였냐고? (웃음) 늘 그런 시선을 받는다. 이런저런 재능이 있다고들 얘기하시지만 나 스스로는 그게 다 아직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것저것 직접 내 손으로 하게 됐다. 아, 그렇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OST 곡까지 직접 만들게 된 건 결국 예산 때문이었다. 다른 쪽에 제작을 의뢰할 돈이 없었으니까. 내가 직접 하는 게 돈이 안 드니까.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다. 별건 아니다. (웃음)”
작가주의의 짙은 향내 느껴
정말 별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른바 톱스타라는 조승우와 류덕환, 남상미 같은 배우가 선뜻 그녀의 영화에 출연한 것도 별게 아니었던 것일까. 그들은 아마도 구혜선에게서 작가주의의 짙은 향내를 느꼈을 것 같다. 차세대의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한 명으로 성장할 그녀를 미리 선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영화 를 주목해서 봐야 할 이유는 그 때문이다.
대표집필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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