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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밀어가 우릴 구원한다

웃음으로 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강철대오…> 육상효 감독

“혁명, 총구 따위가 아닌 연애의 상상력이 우릴 구할 진정한 힘”
등록 2012-11-07 11:25 수정 2020-05-03 04:27

때는 바야흐로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현장 내부에 백골단 프락치가 끼어 있다는 얘기가 돈다. 용의자는 몇 명으로 압축되고, 이들을 상대로 때아닌 운동권 테스트가 실시된다. 리더 격 학생이 프락치로 의심받고 있는 강문모(영화 속에서 ‘도바리’에 도가 튼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신분을 위장하고 있어 프락치로 오인받는다)에게 속사포 같은 질문을 이어간다. “자민투?” 그러면 강문모가 즉답한다.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 공세. “민민투?”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삼민투?”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강문모의 대답이 시원시원하게 이어지고 농성장의 학생들은 의심을 걷어들인다.

“혁명도 웃음 통한 낙관으로 이루어진다”

육상효 감독의 새 영화 은 1985년에 실제 벌어졌던 서울 을지로 소재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그린다. 당시 고려대·서강대·서울대·성균관대 등 삼민투 소속 수도권 대학생 70여 명은 기습적으로 미국문화원에 난입해,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 사건으로 한국 학생운동에 반미 노선이 급부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PD(PDR·People’s D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혁명) 계열과 NL(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계열의 정치투쟁 노선이 본격화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 그건 그렇고, 영화는 코미디다. 학생운동사에서 최초로 반미 노선을 전면에 등장시킨 사건을 코미디로 그린다? 그게 가능한 얘기일까. 이 대목에서 육상효는 빙긋,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는 서울대 82학번이다. 학생운동 시대의 회오리바람 한가운데에 살았다.

“학생운동을 앞에서 하기보다는 옆에서 해왔던 사람으로서 허허, 근데 그때도 그랬던 기억이 난다. 삼민투, 민민투, 자민투 등으로 얘기를 하는데 난 죄다 그 말이 그 말 같았다. 차이가 뭘까 싶었다. 당시가 격랑의 시대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소영웅주의와 치기가 판을 쳤다. 그건 한편으로 순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약한 자의 진정한 무기는 웃음이다. 혁명도 웃음을 통한 낙관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든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제목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처음엔 그냥 ‘구국의 강철대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절대로 흥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그래도 흥행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다. 이 영화는 현재 극장가에서 고전하고 있다. 비평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음에도 일반 관객들은 다소 차갑게 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구국’ ‘강철’ ‘대오’ 같은 단어는 대부분 1985년 이후에 태어난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독하게 낯선 것이다. 제목에서 이런 단어들을 아예 뺏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포스터는 주인공 김인권이 체 게바라 베레모를 쓰고 그와 비슷한 포즈로 찍은 사진이다. 영화가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정면으로 내비치고 말았다. 정치와 관련됐다 하면 무조건 안 보고 시작하는 것이 요즘 세태다.

애드리브 강한 박철민의 연기 지도

은 학생운동의 회오리 안에 있던 이들이 웃음으로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다. 영화를 만든 육상효 감독(왼쪽)과 출연한 배우 박철민. 사진 탁기형 기자

은 학생운동의 회오리 안에 있던 이들이 웃음으로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다. 영화를 만든 육상효 감독(왼쪽)과 출연한 배우 박철민. 사진 탁기형 기자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재밌다. 이렇다. 대학 주변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부로 일하는, 일명 ‘철가방’ 강대오(김인권)는 신속·정확한 배달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생활의 달인이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함께 일하며 형제처럼 지내는 황비홍(박철민)이란 인물이 있다. 강대오는 어느 날 여자 기숙사에 배달을 갔다가 여대생 서예린(유다인)에게 홀딱 빠진다. 황비홍의 만류에도 강대오는 서예린에게 구애를 하러 접근했다가 얼떨결에 그녀의 뒤를 쫓아 미국문화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아뿔싸, 일은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김인권을 비롯해서 박철민과 조정석(강문모 역) 등 이른바 ‘연기감이 좋다’는 배우들의 앙상블로 갖가지 리듬을 타며 사람들을 웃긴다(적어도 486세대 관객에게만큼은). 그중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박철민의 연기는 중간중간 극의 분위기를 코믹하게 업시킨다.

육상효가 박철민의 옆구리를 찌른다. “어찌나 애드리브가 강하시던지….” 박철민이 내가 뭘, 어디서 그랬느냐는 식으로 눈을 흘긴다. “아, 그때 그랬잖아. 서예린에게 구애를 하러 나가는 강대오의 길목을 막고 황비홍이 얘기하는 장면. 그때 당신이 그랬잖아. 철가방이 여대생을 사랑하는 건, 스님 머리에 핀 꽂기다, 라고. 그런 얘기는 도대체 어디서 다 듣고 알게 된 거야? (웃음)”

하지만 박철민이 이 영화에서 그저 ‘웃기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결국 운동권 학생들처럼 철가방들을 규합해 전국철가방연합회를 조직해낸다.

“나 역시 학생운동을 앞에서라기보다는 뒤에서 한 사람으로서…. (웃음) 사실 1985년은 내가 막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반독재 투쟁이 정점을 향해 치달을 때였고, 그때 일을 이렇게 세월이 지나 다시 얘기할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내게는 김지훈 감독의 때의 경험이 있다. 낯선 배역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이번엔 좀더 실감이 나는 느낌이었달까.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 가운데 그때 일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연기 지도 같은, (웃음) 뭐 그런 역할도 했다. 예를 들어 극중 강문모가 를 부르는 장면 같은 것? 그 노래를 어떤 톤으로, 어떤 느낌으로 불러야 하는지 조정석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육상효가 다시 쿡 찌른다. “1980년대에 대해 온갖 고증을 다 맡으셨다니까, 이번 영화에서.”

를 부를 때…

그래 맞다. 이 영화에서 김지하의 를 조정석이 부를 때,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민주화를 타는 목마름으로 외쳐 부를 때가 우리에게 존재했다.

전설의 선배 운동가 강문모는 그를 연모하는 서예린과 점거농성 이후의 투쟁 노선을 두고 살짝 말싸움을 벌인다. 서예린은 묻는다. “선배는 혁명이 사랑을 담보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강문모는 답한다. “예린아 아냐. 사랑이 혁명을 담보하는 거야.”

그 둘의 대사에 이 영화의 모든 주제가 함축돼 있다. 육상효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혁명이 아니다. 사랑이다. 혁명, 총구 따위는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연애의 상상력, 그 사랑의 밀어가 우리를 구원할 진정한 힘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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