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며칠째 모진 고문을 당하던 김종태는 어느 날 비교적 말쑥하고 점잖게 차려입은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김종태의 눈에 플래시를 비추며 이리저리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깨 근육을 포함해 여기저기를 검사한다. 김종태는 그가 의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급하게 남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고문을 당했고 법적 근거 없이 며칠째 감금돼 있다고. 옆에서 수사관들이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는 순간적으로 김종태의 어깨를 잡아 뺀다. 이른바 어깨빼기다. 김종태는 극심한 고통으로 바닥에 나뒹군다. 김종태는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진짜 고문기술자가 왔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고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김종태에게는 곧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정지영 감독께서 전화도 주시고 이메일도 주셨다. 이두한 역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셨다. 감독님의 그런 간곡한 청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당연히 이 역을 하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두한 역을 정말 하고 싶었다. 매력적인 배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배우라면 모두들 이두한 역에 욕심을 냈을 것이다.” 선입견이었을까. 적어도 이경영에게서는, 감독으로부터 역할 제의를 받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줄 알았다. 그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 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극중 이름 이두한 역을 맡았다. 영화는 약 1시간46분의 러닝타임 동안 오로지 고문을 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고문을 당하는 김종태 역의 박원상도 박원상이지만 끝 간 데 없이 잔인한 인간을 연기한 이경영에게 시선이 쏠린다. 극중에서 이두한은 한 번도 흥분하지 않는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상대를 고문한다. 죽음 직전까지. 이때 이경영의 무표정하면서도 차분한 연기는 보는 사람들의 치를 떨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휘파람! 을 읊조리는 그 휘파람 소리. 고문 장비를 준비하며 이두한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분다. 김종태는 이제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머리털이 바짝바짝 선다. 그건 고문의 순간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두한 역을 준비하며 실제 인물인 이근안을 연구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근안, 내가 상상하는 이근안으로 연기하려고 애썼다. 스스로 그 캐릭터에 대한 설정을 만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이근안스러웠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박원상의 칠성판 원샷이 하이라이트”를 본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 잔인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휙 갈 만큼 영화는 재밌다. 그건 이상한 역설이자, 기묘한 배반의 정서 같은 것이다. 는 상업영화로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김근태의 극중 이름 김종태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이, 당연히, 고생이 많았던 작품이다. 박원상은 전작 에 이어 정지영 감독의 영화에 잇따라 주연으로 출연했다. 가해자 역인 이경영보다 피해자 역인 박원상이 오히려 약간 주저했다는 후문이다.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워낙 컸고, 이런 작품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게 평범한 역할은 아니니까 과연 촬영 끝까지 내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긴 했다. 감독님께 부탁했던 건, 몸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정면 누드를 보여준다. 칠성판 위에 사지가 묶인 채 눈을 가리고 누워 있는 신이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참혹하며,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정지영 감독은 전기고문으로 이곳저곳이 타들어간데다 오로지 가린 곳이라곤 눈밖에 없는 몸통을 부감샷으로, 그것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프레임 바깥에서는 수사관들이 희희덕거리는 소리가 깔린다.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짐승의 접경은 생각보다 가깝다. 가 얘기하려는 것은 이 장면 하나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감독님이 그 장면을 찍자고 했을 때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다.”(박원상) “처음엔 수사관들이 두런두런 일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프레임 안에 더 넣어서 풀샷으로 찍으려고도 하셨다. 그게 더 비인간적인 느낌이니까. 그런데 막상 박원상의 벌거벗은 모습 원샷을 찍고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시더라. 지금 보니 그 판단이 맞았던 것 같다.”(이경영) 박원상과 이경영도 이 장면이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두 사람은 이 대목에서만 입을 맞추는 게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진 대중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이 같다. 둘은 동시에 번갈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과거의 그같은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 영화를 봤으면 한다. 설령 아들에게서 저런 일을 당하고도 아직 우리 사회가 이 정도밖에 안 됐느냐는 얘기를 들을지언정, 과거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살고 있으며,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함을 같이 얘기하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다행히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나왔다.”
는 치열한 세계관을 일관되게 지켜온 한 감독의 노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작품이다. 한편으론 이경영·박원상 같은 배우가 없었다면 절대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고문을 가하는 것, 혹은 당하는 것은, 아무리 연기라 한들 고도의 집중력이 없으면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한 장면 한 장면 찍으며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심하게 탈진됐던 건 그 때문이다.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 한마음이 아니었으면 완성되기 어려웠던 영화다.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박원상은 덧붙인다.
관객 많아질수록 세상 달라질 것쉽게 써지고, 편하게 얘기되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스크린이 백지장처럼 하얗게만 보일 뿐 한 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말하지 않는 것, 그건 침묵과는 조금 다른데, 어쨌든 그럼으로써 더 많은 말을 전달하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가 바로 그런 영화다. 앞으로 극장 박스오피스 앞에 침묵과 자성과 각오의 줄이 이어질 것이다. 관객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좀 달라질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때가 있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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