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8년 겨울, 주말이 가까운 어느 날 허진호는 서울 외곽에서 택시를 탄다. 기사에게 시내 한복판 종로3가에 있는 피카디리극장(지금의 피카디리 롯데)으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 기사가 불쑥 물었다. “아니 근데, 그쪽에 지금 뭔 일 있어요?” 약간은 이상야릇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 뱃속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흥행이 잘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데뷔작 가 막 개봉한 터였다.
“사랑에 대한 영원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
“극장 쪽으로 가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봤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다. 모두들 내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몰랐다. 표정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걸 진짜 좋아해야 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그 판단 자체가 안 됐다. 정말 그랬다. 이광훈 감독( 등 연출)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팔을 잡으며 말했다. ‘허 감독. 좋아해도 돼요. 좋아하세요’라고. 아, 근데 진짜 요즘 그렇게 한번 신나게 좋아해봤으면 좋겠다. 제대로 좋아해줄 수 있는데. (웃음)”
그 신나게 좋아해봤으면 하는 일이 바로 새로 개봉할 영화 를 두고 하는 얘기다. 허진호는 요즘 흥행에 목말라 있다. 허진호 하면 한국 멜로영화의 수준을 몇 단계 바꾼 지존쯤으로 여겨진다. 로 시작해 과 , 까지 그의 영화를 두고 사람들은 ‘허진호식’ 멜로라고 부른다. 그는 ‘허진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갖지 못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근데 난 흥행이 안 된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 출신은 그런 부분에 초연하도록 배웠다. 그런데 난 지금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그는 활짝 웃는 척 씁쓸해한다.
영화 는 1780년대 프랑스의 서간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썼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어서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다.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영국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1988년 동명 작품이 있고, 체코 출신 밀로시 포르만 감독도 거의 동시대인 1989년에 이란 제목으로 만들었으며, 1999년엔 로저 컴블이 이란 제목으로, 2003년엔 이재용 감독이 로 만들었다. 대중 상업영화로 지난 20여 년간 만들어진 작품만 네 편이다. 허진호는 왜 여기 다시 손을 댔을까.
“그만큼 고전이 좋았다. 물론 앞선 네 편의 영화도 모두 좋아한다. 다들 더 이상 따라갈 수 없게끔 잘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엔 나도 다시 이걸 영화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 좀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책을 봤다. 소설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진호는 시간과 공간을 1931년의 중국 상하이로 옮겨온다. 최고의 플레이보이라는 셰이판(장동건)이나 치명적인 유혹의 여인 모지에위(장바이즈), 순도 100%의 미망인인 뚜펀위(장쯔이) 모두 화려하면서도 염세적인, 한편으로는 이제 곧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의 도시 상하이의 한 상류층 파티에서 만나게 된다. 모지에위는 셰이판에게 뚜펀위를 무너뜨리면 자신을 그에게 주겠다고 얘기한다. 셰이판은 모지에위와의 사랑을 위해 뚜펀위를 대상으로 게임을 벌이지만 점점 더 어느 쪽이 진짜 사랑이고 어느 쪽이 게임에 불과한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난 액션영화 찍으면 안 되나?”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장동건과 장쯔이의 키스신이다. 여자는 처음에 남자가 자신을 안을 때 수동적일 경우가 많다. 여자는 그저 팔을 내려뜨리고 서 있다. 그러다가 한팔 한팔이 조금씩 조금씩 남자의 등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힘껏 부둥켜안는다. 그 약간의 시간 차이야말로 남자와 여자의 마음속 시간 차이이며 사랑의 시간 차이다. 남자는 쉽게 뜨거워지고 금방 식지만 여자는 마지막 순간에 허락하고 그걸 끝까지 간직하는 타입이다. 장동건과 장쯔이는 키스를 할 듯 말 듯 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데 사람들은 느낀다. 극중에서 장동건은 자신이 키스를 하는 순간 장쯔이와 사랑에 빠질 것임을 안다. 이건 게임에 불과해, 라는 왼쪽 귀의 속삼임과 이제 그녀와 사랑해, 라는 오른쪽 귀의 달콤한 밀어 사이에서 장동건은 갈등한다. 장쯔이는 살짝 입을 벌리고 이제는 어서 그가 자신에게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는 놀랍게도 지금까지의 허진호 영화와는 아주 다른 스타일과 호흡으로 가는 영화다. 그럼에도 영화의 끝을 향해 함께 달려가다 보면 이건 영락없이 허진호표 멜로영화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허진호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허진호 영화가 아닌, 앞서 기존의 영화이면서도 또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이 나온 셈이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영화를 보는 건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다.
“좀 달라지고 싶었다. 어느 날 밤늦은 술집에서 내 영화 가 TV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왜 저렇게 컷들이 길까 싶었다. (웃음) 물론 안다. 그게 나의 트레이드마크였다는 거. 그런데 이제 그게 나 스스로 지루해졌다. 조금 빠르고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다. 액션도 강하고 코미디도 있고. 왜? 나는 액션영화 찍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가?”
에서 허진호가 쓴 컷 수는 200여 개다. 이번 에서 허진호는 무려 1700컷으로 장면을 분할했다. 이야기가 빠르게 점핑하고, 빅클로즈업으로 인물의 표정을 연속해서 바꿔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의 그의 느린 영화처럼 이번 도 인물들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장동건과 장쯔이의 러브라인이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장바이즈의 팜파탈형 매력을 높이 살 것이다. 상하이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장동건과 장바이즈는 이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순수한 속내를 드러낸다. 세간에는 난봉꾼이고 악녀로 알려졌지만 이들 마음속에도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처가 있어 보인다. 외로워 보인다. 사람들이, 특히 남자와 여자가 끊임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신하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게 바로 인류 역사의 본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허진호를 만날 준비를 해야
허진호의 삶은 이제 이전과 그 이후로 바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후의 행보가 이전보다 훨씬 더 발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벌써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예전엔 이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허진호였다. 이제 우리는 다른 허진호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 참 기대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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