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리 대단한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장모가 쾌척한 1천만원으로 서울 강남에 빌보드 광고판을 올릴 때도 그저 15만 명 정도가 봐주면 이 영화를 만든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봤다. 민병훈 감독은 자신의 새 영화 를 4년 동안 준비했다. 4년이나 걸린 건 작품을 정교하게 교직해내겠다는 신중한 준비 자세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작으로 뽑힐 만큼 시나리오가 우수했다. 그러나 거기서 받은 3천만원이 전부였다. 1억5천만원이 들어가는 제작비는 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민병훈은 천신만고 끝에 돈을 마련했다. 절친인 유준상을 불러서 거의 노 개런티로 주연을 맡겼다. 여자 주연인 김지영도 시나리오와 감독을 믿고 출연에 응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그래도 영화는 순항을 타는 듯했다.
천대받은 서민 부부의 이야기그러나 여지없이 복병을 만났다. 그 비싼 강남역에 광고판까지 세웠지만 강남 그 어느 곳 멀티플렉스에도 는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전국 20개 스크린에서 개봉됐지만 아침 8시대, 아니면 저녁 늦은 시간에만 걸리는, 이른바 ‘교차 상영’의 덫에 걸렸다. 결국 이건 관객에게 영화를 보지 말라는 얘기와 같았다. 민병훈은 개봉 8일 만에 자진해서 영화를 종영시켰다.
“내 영화는 내가 죽일 권리가 있다고 봤다. 계속 상영한다는 건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굴욕적이었다. 교차 상영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내가 많이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첫 주말만이라도 영화가 올곧이 개봉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목요일 개봉하고 금·토·일요일까지만. 그렇게 단 나흘이라도. 근데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것일까?” 민병훈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함과 피곤함이 느껴진다. 듣는 사람도 짜증이 난다. 이게 언제까지 반복돼야 하는 일인가. 얼마나 많은 감독과 제작자, 영화인들이 피를 토하듯 절규해야 극장들은, 그리고 세상은 귀기울일 것인가.
이번 종영 사태는 교차 상영 문제에 대한, 더 나아가 비상업영화에 대한 상영권 보장이라는 문제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민병훈 감독은 앞으로 영화계의 새로운 투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이 러시아 유학파이자 안드레이 타르콥스키파 감독이 정녕 원하던 일이겠는가. 그는 그저 조용히 예술영화를 찍으려는 생각뿐이었다. 세상은 많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벌써 그런 장편영화를 만든 게 이번이 네 번째다. 와 , 그리고 등 일명 ‘두려움 3부작’이 거기 포함돼 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민병훈을 자꾸 전사로 내몰고 있는 것인가.
는 한 서민층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남편은 한때 잘나가는 사격 선수였지만 알코올중독으로 많은 것을 잃은 상태다. 이제 올림픽 출전은 언감생심, 올림픽 꿈나무를 키우는 고등부 사격 코치로서도 늘상 천대받기 일쑤다. 퇴출될 위기의 그는 여성 이사장의 유혹을 받는다. 3년 계약 연장의 대가로 그녀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는 처절하다. 문제는 그 이사장 때문에 끊었던 술을 마셔야 했고, 그 상태에서 불량학생들과 시비가 붙었으며, 또 그러다 음주 상태로 차를 몰다가 대형 사고를 친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지리멸렬한 남편과 살다가 짜증과 우울증이 심해진 상태다. 아내는 종합병원의 간병인으로 일하며 가족도 전전긍긍하는 노인 환자들을 무연고 처리로 서류를 위장해 자연스럽게 안락사에 이르게 하는 일을 한다. 그러려면 한 가톨릭 교구의 요양원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내야 한다. 게다가 아내는 노인 환자로부터 성적 수발까지 요구받는다. 그것 또한 어찌하겠는가. 아내는 고민하고 슬퍼하며 갈등한다. 그러다 그녀는 진짜 연고가 전혀 없는, 죽어가는 이웃 여자를 만나게 되고 이젠 진정으로 그 여자를 살리려고(혹은 평화롭게 죽이려고) 애쓴다.
“이제는 서로 좀 만지고 살라고”민병훈 감독은 가 자신이 새로 시작하는 ‘생명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얘기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선 내내 죽음이 느껴진다. 안전하게 죽을 권리, 그 사회적 논란에 대해 점화를 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없는 자들은, 사실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는 게 문제인 시대다. 평화롭게 죽는다는 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는 정상적으로 상영됐다면 상당한 사회적·종교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영화다.
“지금 세상에는 작은 터치가 필요한 때라고 봤다. 우리는 그저 무심코,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살짝만 건드려줘도 아픈 사람이 나을 수 있다. 살짝만 만져줘도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한다. 제목을 ‘터치’라고 지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는 좀 서로서로 건드리고 만지고 살라고.”
영화 속에서는 직설적인 장면과 화법이 꽤나 나온다. 여 이사장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들이민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디로 올라가는 것일까. 아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 환자가 몸 가까이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자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면 통장은 제게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병상 커튼을 소리 나게 잡아당긴다. 그 안에서 아내는 노인에게 무슨 간호를 해주게 되는 것일까.
구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엄혹한 자본주의는 그걸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덕을 얘기하고 영혼의 순결성을 얘기하지만 그건 다 있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울 좋은 규율일 뿐이다. 사람들은 몸을 팔고, 영혼을 팔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다 던져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다. 그 안에서 생명의 희망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와 가치가 과연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남편과 아내는 종종 구질구질한 달동네의 골목길에서, 혹은 삶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꽃사슴의 환영을 본다. 사슴은 저 먼발치에서 슬픈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본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청문회 비슷한 것을 열었다. 나를 포함해 극장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지난 7월 ‘한국영화 동반성장 협약’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그 차원에서 각자의 진술을 듣는다는 취지였다. 위원들에게서 내가 들은 얘기 가운데 가장 치명적이라고 느낀 것은 ‘새삼스럽게’라는 표현이었다. 내 영화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진대 왜 지금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냐는 의미였던 것 같다. 절망감을 느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아니 지금의 세상은, 민병훈과 그의 영화 혹은 그의 영화와 비슷한 영화들에 속 남편과 아내가 겪는 일을 받아들이라고 얘기하는 꼴이다. 그냥 몸을 팔라고 한다. 당신들한테 무슨 영혼 같은 것이 있느냐고 비아냥댄다. 너만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들 한다. 다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단 한 작품이라도 소외받지 않아야한국 영화 관객 1억 명 시대라고 한다. 새로운 르네상스가 왔다고 언론이 흥분하고, 일부 영화인들과 영화정책을 이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흥분한다. 를 보고 있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단 한 명, 단 한 작품이라도 소외받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다수보다는 소수에게 애정을 기울일 때 거기서 희망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영화 제목대로 단 한 번만이라도 ‘터치’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건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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