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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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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와 감독 환상적인 만남

조성희 감독 믿고 영화 <늑대소년> 맡긴 영화사 비단길 김수진 대표
영화는 의지의 소산, 제작자 굳은 결기가 좋은 작품 만드는 법
등록 2012-12-18 18:46 수정 2020-05-03 04:27
감성적인 기운이 남달랐던 조성희 감독(왼쪽)과 베팅 감각이 뛰어난 제작자 김수진 대표가 만나 영화 을 만들었다. 은 제작자와 감독의 화학적 결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한겨레 정용일

감성적인 기운이 남달랐던 조성희 감독(왼쪽)과 베팅 감각이 뛰어난 제작자 김수진 대표가 만나 영화 을 만들었다. 은 제작자와 감독의 화학적 결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한겨레 정용일

사람들을 피해 동굴에서 하루를 지새운 순이(박보영)와 늑대소년 철수(송중기)는 이제 막바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이는 마음을 다져 잡는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살리는 방법은 이 길뿐이다. 하지만 늑대소년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가려 한다. 순이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외쳐댄다. 나는 네가 싫다고. 그러니 어서 멀리 꺼져버리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눈물을 철철 흘린다. 말 못하는 짐승인 이 늑대소년도 운다. 처음으로 사람 말을 한다. “가지 마.”

멜로로 유혹하고 가족으로 끄는

개봉 두 달을 훌쩍 넘기며 700만 관객을 모으고 있는 은 섬세한 감수성의 멜로드라마다. 시대는 47년 전, 1960년대가 배경이지만 영화는 관객을 기묘한 판타지의 공간으로 이끈다. 얼핏 어린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고 송중기라는 새끈한 외모의 스타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대박을 터뜨리게 한 요소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게 단순한 청춘 멜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끈끈한 가족 드라마의 틀을 유지하고 있어 광범위한 연령대의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영화가 5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으려면 장년층이 동원돼야 한다. 에는 어머니와 함께 온 여성 관객이 차고 넘친다.

“이렇게 흥행이 잘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저 다음 작품을 계속 이어갈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였다. 팬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 이어졌고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주겠다는 마음에서, 그 성의에 보답하고자 확장판을 새로 편집했다. 2분 정도가 추가됐고 엔딩 부분을 살짝 고쳤다.” 단 한 편의 영화 작업으로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재능을 인정받는 데 성공한 조성희 감독의 말이다. 조성희 감독은 신인이지만 신인이 아니기도 하다. 그의 전작들은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날이 숨어 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비관적 태도가 느껴진다.

그런 그를 알아본 사람이 영화사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였다. “독립영화였던 과 을 보고 내가 먼저 조성희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크게 되겠다고 봤다. 사람들은 이 내 아이템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성희 감독에게는 그냥 연출만 맡긴 것이 아니냐고 묻곤 한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조 감독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것이다. 시나리오가 워낙 좋았다.”

영화사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는 의 성공으로 충무로의 새로운 미다스 손으로 등극했다. 항간에 그녀는 지독한 근성의 여성 프로듀서로 알려져 있다. 비단길을 설립한 뒤 지난 6년간 과 등의 영화를 만들어 잇따라 성공시켰다. 김수진은 새로운 감독을 스타급으로 만드는 데 귀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 이전부터 저력을 보이긴 했지만 대중적으로는 아직 검증받지 못한 감독들을 기용해 영화를 성공시키는 탁월한 전법을 선보인다. 의 김대우 감독이 그랬고 의 나홍진, 의 이호재 감독이 그랬다. 감독을 보는 선구안이 남다르고 베팅 감각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프로듀서의 세심한 뒷받침이 주효

“항간에는 무서운 분, 고집이 센 분이라고들 얘기하는지 모르지만 감독의 연출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은 아주 자유롭게 찍었다. 많은 대화를 했고, 나보다 더 작품에 대한 걱정, 관심이 많은 걸 보고 놀랐다.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눈앞이 깜깜했다. 앞으로 과연 영화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초조함이 컸다. 김수진 대표 덕에 영화 세상의 문을 열었다.” 조성희 감독이 이렇게 말할 만큼 김수진과의 결합으로 조성희는 밝아졌다. 의 첫 시나리오는 비극적인 감성이 앞장서 있었지만 영화 개발 과정에서 더 폭넓은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는 대중영화로 거듭났다.

김수진 대표는 이렇게 화답한다. “그동안 영화를 만들며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모르게 너무 순조로웠다. 이렇게 뛰어난 감독도 만났고, 시나리오도 술술 나갔으며, 투자도 거의 단박에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그랬고. 송중기는 이번 영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것처럼 열심히 해줬다. 감독이 오케이라고 해도 본인이 한 번 더 찍자고 했을 정도니까. 은 행복한 영화였다. 단지 흥행이 잘됐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행복한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해준 작품이었다.”

한 명의 감독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데는 프로듀서의 세심한 뒷받침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듀서는 지켜야 할 선이 있으며 그 선을 넘으면 간섭이 되고 반대로 그 선을 너무 멀리 놔두면 영화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그 선을 지킨다는 게 말로는 쉽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엔딩에 할머니가 된 순이(이영란)가 과거에 늑대소년이 살았던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문까지 다가서고,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잘랐다. 짧게 편집했다.”(조성희)

“그런데 나는 그게 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한 번에 그 문을 열 수 있겠느냐고 감독에게 물어봤다. 여성의 감정으로는 그 문을 쉽게 열지 못한다. 그래서 한 번은 발길을 돌려 다시 창고를 나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망설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감독이 내 말을 따라줬다. 프로듀서는 제작자로서 간섭을 하는 게 아니라 1차 관객의 눈으로 작품을 봐야 한다. 그 장면이 비평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중적으로는 맞았다고 본다.”(김수진)

비평가가 보기에도 그게 맞다. 그 대목에서 관객들의 마음은 아우성친다. 어서 문을 열어, 문을 열라고! 할머니가 된 여자 주인공이 느리게 걷는 동안 관객은 변해 있을 늑대소년의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김수진과 조성희는 제작자와 감독의 환상적인 만남, 최고의 화학적 결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만들며 두 쪽 사람은 원수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영화가 성공해도 그렇다. 영광을 서로 나눠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조성희 감독, 새로운 영화 만들 재목

새로운 스타급 감독을 만나게 되는 건 늘 반가운 일이다. 영화는 항상 새로워야 하며 그건 새로운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성희 감독이 앞으로 그런 재목이 될 것이다. 영화는 의지의 소산이며 일단 제작자의 굳은 결기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법이다. 김수진 같은 기량이 뛰어난 제작자가 건재한 것도 고마운 일이다. 을 보며 송중기·박보영이라는 두 스타 말고도 감독과 제작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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