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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붙고 YS가 떨어지는 게

옛말이 된 ‘입시한파’
등록 2012-11-16 20:45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김봉규

한겨레 김봉규

대선과 대입. 12월19일 대선이 치러진다. 11월8일에는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되돌아보니 가슴이 아프다. 나는 대선과 대입을 맞바꿨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YS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던 해, 나는 대입시험을 망쳤다. 당시 학력고사는 입학을 원하는 대학에 먼저 원서를 내고 국·영·수·필수과목·선택과목 주·객관식 320점+체력장 20점+내신 약간으로 등수를 매겨 당락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월가 파생상품처럼 복잡한 지금의 입시제도와 달리, 흔히 말해 1등부터 꼴등까지 점수로 줄 세우는 아주 간편한 방식이었다. 애초 전기대 학력고사(이런 게 있었다) 날짜는 관례대로 해마다 12월의 어느 화요일에 정해져야 했다. 12월15일이 유력했다. 대선이 12월18일을 선점하자 나의 인생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학력고사 날짜는 대선 뒤인 12월22일로 늦춰졌다. 불길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지하철로 1시간이면 가는 거리였지만 시험 전날 집을 떠났다. 지원한 대학에 먼저 다니고 있던 형의 자취방에서 세계사 연표라도 하나 더 외우자는 야수의 심정이었다. 엄마는 “미역국이라도 끓여줘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시험을 앞두고 교실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보고도 ‘지우개가 바닥에 붙었다’며, 반쯤 정신 나간 셰익스피어식 고급 화법을 구사하는 막내아들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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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당일 새벽. 해조류 세트가 남해바다 해파리떼처럼 급습할 줄이야. 형이 나를 깨웠다. “밥은 먹고 시험을 봐야지. 게다가 생일이잖아. 형이 미역국 끓였다.” 이 인간이, 소리가 목구멍을 넘어오려 했다. 보니까 즉석 미역국이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어, 고마워. 참 고마워. 그해 학력고사는 참으로 쉬웠다고 한다. 남들 10점씩 오를 때 나는 10점이 떨어졌고 대학도 떨어졌다.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는 직진 인생이 꿈이었던지라 확률편까지는 잘 풀지도 않았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경우의 수도 별로 생각에 없었다. 나는 당시 다른 수험생들처럼 한 달쯤 놀다가 후기대 학력고사(그런 게 있었다)를 그냥 치렀다. 합격했지만 다니지 않았다. 재수 생활이 시작됐다. 입시제도가 바뀐 첫해였다. 그해에는 수학능력시험을 2번이나 봤다. 본고사와 논술시험도 도입됐다. 대학에 들어가고 한참 뒤 과외라도 해보자며 만든 전단지에 ‘전·후기 학력고사, 수능시험 2번, 본고사, 논술시험을 모두 거친 베테랑’이라는 어이없는 문구를 넣었다. 그랜드슬럼 같은 대단한 경력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를 찾는 삐삐는 절대 울리지 않았다.

1992년 12월22일 ‘입시한파’는 그리 세지 않았다. 기사를 찾아보니 영하 3℃ 정도였다나. 12월, 가뜩이나 마음 추운 수험생들을 해마다 괴롭혔던 입시한파는 수시입학 등 각종 입시제도가 생기면서 기상 이변이 없는 한 옛말이 됐다. 올해 수능시험도 대략 따뜻하게 치러졌다. 어쨌든 YS는 5년 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나라를 몰고 갔다. 차라리 내가 대학 붙고 YS가 떨어지는 게 좋지 않았을까.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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