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후반이 나쁘다. 꼭 늦는 느낌이다. 오전반은 늦는 느낌이 안 들어서 좋다. 5학년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 5학년부터는 오후반이 없기 때문이다.”(1983년 4월18일 월요일. 남일이의 일기)
지금은 오후가 너무 좋다. 술 퍼마시고 아침에 출근하는 것은, 체육인에게 공부까지 병행하라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돌려차기’하는 이에게 한정된 이야기다). 책장에서 국민학교 3학년 일기장을 꺼내 들춰봤다. 친구들과 야구했다, 누구가 얄밉다, 선생님한테 글씨 똑바로 쓰라고 혼났다, 컴퓨터 오락을 했다, 시험을 어찌 봤는지 모르겠다, 뻔한 주제들 사이에서 ‘시간’에 대한 철학적 문제의식이 반짝이는 일기를 찾아냈다. “오후반은 늦는 느낌이다.”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주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가령 ‘오후반이 시간을 빠르게 하는가?’ ‘오후반에서 도피하는 것은 합당한가?’ 나는 조선보다는 프랑스형 인간이었나. 어우.
오후반이라는 게 있었다. 1990년대까지도 과밀 학급, 콩나물 교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일부 2부제 수업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었다. 2000년대에도 교실 증축이나 학구 조정 문제 등으로 2부제 수업이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무지하게 큰 왕건이 학교에서 1학년을 다니다가, 학생이 너무 많다며 그 학교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학교로 옮겨졌다. 형과 누나는 계속 왕건이 학교에 다녔다. 전교 조회 시간에는 좁은 현관으로 검은 콩나물 대가리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나오는 그런 학교였다. 비유는 좀 그렇지만 장마철 폭우에 하수구 넘치는 듯했다. “깔려 죽는다”며 선생님들이 절대로 뛰지 못하게 했다. 깔려 죽은 학생이 밤마다 유관순 동상과 손잡고 논다고 했다. 어쨌든, 부스러기 학교에 다니게 된 나 역시 한 반 60명이 넘실대는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한 달씩이었나, 격주였나, 오전반·오후반을 번갈아 다녔다.
오후반은 외롭다.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기도 했다. 주로 밥과 날계란에 간장을 조금 뿌려 비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의 ‘고양이 맘마’스럽지만 그때는 몰랐다. 어떤 날은 오전에 집으로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반공 포스터가 급한데, 빨리 그려서 오후에 등교할 때 들고 오라고 했다. 시간은 점점 가고 마음은 급한데 그림이 빨리 나올 리 없다. 마룻바닥에 앉아 엉엉 울면서 크레파스로 김일성 동상을 그리고, 뭐라고 위아래로 씨부리는 표어를 썼던 기억이 난다. 비 오는 날이면, 아침에 온 가족이 멀쩡한 우산을 다 들고 갔다. ‘찢어진 우산’ 동요는 그래서 나왔나 보다.
1980년대는 그래도 양반이다. 1960년대에는 전교생이 1만 명을 넘고 한 학년에 20개 반이 넘는 매머드급 학교들이 있었다. 교실이 부족하니 2부제, 심지어 3부제로 여러 반이 한 교실을 돌아가며 썼다. 얼마 전에 조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한 반에 20명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오후반은 참 좋은 제도였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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