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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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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추억

삐삐, CD플레이어와 12번 버스
등록 2012-03-31 11:13 수정 2020-05-03 04:26

(스포일러+서울중심주의+학벌주의+긴머리중심주의+질투 있음) 영화 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추억을 팔아먹는 영화니 일단 ‘어디 갔어’에 어울린다. 방송기자질 하는 대학 동기놈이 먼저 영화를 보고는 “완전 우리 94학번 이야기”라고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놈에게 그런 첫사랑이 있을 리 없다. 영화를 봤다. 영화 배경은 1994년도 아니고 1996년이었다. 정신 나간 사장 밑에서 더 고생해라. 그놈이나 나나 재수생이었지만, 영화 속 ‘납뜩이’ 같은 연애 상담 재주는 생기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건축학개론 강의 중에 삐삐(비퍼) 소리가 울리자 교수가 버럭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잡동서랍에는 모토롤라가 만든 삐삐의 ‘명작’ 브라보 플러스 모델이 소장돼 있다. 심장을 흔드는 초강력 진동, 뭔가 주한미군스러운 투박한 모양새지만 미 육군 험비처럼 튼튼하다. 누구나 있는 경험이지만 변기통에도 몇 번 빠졌다. 물에 한 번 쓱 씻고 말렸는데 멀쩡했던 기억이 난다. M16 수준이다. 언젠가 비싸게 팔아먹을 생각이다. 1993년 신문을 펴보자. “신용카드 크기와 비슷한 무선호출기가 나왔다. 두께가 5.9mm에 불과하다. 무게는 46g으로 껌 한 통과 비슷하다.” 푸훗.

CD플레이어도 등장한다. 소니의 디스크맨이다. 나는 대학 때 삼성 물건을 썼다. 생각이 없었던 거다. 튐방지 기능이 없어서 이동 중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젠장. 대신 영화처럼 대학 1학년 초 어느 날, 파나소닉 워크맨으로 여학생과 이어폰을 나눠 듣기는 했다. 꽃다지의 이었다. 어우.

영화에는 서울 개포동이 종점인 710번 버스가 나온다. 대학 다닐 때 12번 좌석버스가 있었다. 개포동을 출발해 압구정동, 한남동을 거쳐 신촌까지 이어지는 노선을 달렸다. 강남과 유명 여대를 끼고 달리는 버스였다. 12번 버스에는 ‘엄선된’ 여학생들이 탄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나는 ‘냄새’부터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12번 러브버스, 12번 꽃마차로 불렸다. 술 퍼마시고 한남동에 사는 선배 집에서 잔 뒤 12번 버스를 탔었다. 냄새는 그저 그랬다.

‘압서방’이라는 듣보잡 용어도 자주 등장한다. 압구정동+서초동+방배동의 앞글자를 딴 말이란다. 영화에서는 강남에 대한 선망을 담았다. 난 모르는 말이다. 같이 영화를 본, 같은 과 1년 후배인 아내도 압서방을 모른다. 아내의 집은 압서방에 있었다.

어쨌든 영화 속 ‘서연’(걸그룹 미쓰에이의 수지)은 1학년 여대생의 이데아다. 긴 머리 수지. 앞으로 ‘우리 수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엄태웅한테는 갑자기 첫사랑 돌싱 한가인이 코에 점 찍고 나타난다. 돌싱편인가. 엄씨는 나이 어린 고준희랑 결혼하기로 돼 있는데 말이다. 전생에 야권 연대를 구했나. 차라리 진보신당이나 구하지. 1996년이 추억으로 팔리는 세상이 됐다. 이제 늙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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